[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매미는 얼마 전만 해도 폭염의 녹음 속에 연가를 불러댔다. 매미엔 보통 우화(羽化)라는 말이 뒤따른다. 땅 속에서 애벌레로 긴 세월 지내다가 성충이 되는 것이다. 고진감래로 성공한 사람 역시 우화했다고 한다. 훌륭한 내용도 조금만 깊게 들어가면 모순과 참담함에 직면하는데 우화도 그렇다.

나방도 우화를 한다. 우화되기 전의 상태가 번데기이다. 누에가 고치를 지어 그 안에서 번데기로 변한다. 고치를 찢고 나오면서 성충인 나방으로 우화되는 것이다.

"번데기는 죽여야 해. 그러지 않으면 우화 되려고 고치의 실을 끊어놔서 실을 얻기 어려워." 명주실에 대한 동영상 다큐를 보다가 저 말에 소름이 돋았다. 알고 있지만 저렇게 명료해지자 가슴이 더욱 아려왔다. 살아 있는 번데기들은 고치 안에 든 상태에서 뜨거운 물에 무더기로 담긴다. 그들 입장에선 집단 살해이다. 명주실 원료가 되는 고치가 뜨거운 물 속에서 실로 추출되기 쉽게 변형되어가는 모습이 떼죽음 당하는 번데기들과 겹쳐진다.

저런 과정을 통해 얻어진 명주실은 비단으로 거듭난다. 염색도 되고 가공도 되어 사람은 아득한 날부터 다채로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었다.

삼베와 모시, 무명이 식물성 옷감이라면 비단은 동물성 옷감이다. 식물성에 비해 독특한 특징이 있다. 매끈하고 고급지게 가공할 수 있다. 비단은 문화의 교류에서도 소금이나 차 못지않게 중요하다. 실크로드가 생긴 것이 까마득한 옛날이다. 해양길이 열리기 전엔 실크로드가 동서양 문화 교류의 길로서 독보적이었다.

우화의 이면에 이런 잔혹이 있다고 해서 명주실을 자아내는 일을 그만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옷은 의식주 중의 하나로 문명의 바탕이다. 문명의 바탕엔 이 외에도 잔혹성을 깔고 있는 것이 수두룩하다. 삼베, 모시, 무명만 하더라도 근본으로 들어가면 식물에 대한 폭력에 기반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인간 역시 먹고 먹히는 일, 상극과 상생이 반복되는 우주 원리 속의 사는 만큼 불가피한 것들이 많다. 문제는 지나침이다. 지나치면 문제가 커진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연 및 생명체에 대한 과도한 폭력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을 당연시까지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상징되는 숱한 인류적 재앙들은 상당히 그것에 기인하고 있다.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관점에 선 사상이나 제도, 사람들은 오류가 있어왔음을 시인해야 할 시간이 이미 넘었다. 지금의 문명은 상식적으로 봐도 너무도 위험하고 그 위험도는 시간이 갈수록 커짐이 자명하다.

철학자 메를르 퐁티는 오래 전에 '최소한의 폭력'이란 개념을 썼다.

생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에 대한 폭력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의 폭력에 한정하자. 이렇게 해석될 수 있는 그 말은 철학적으로는 어정쩡한 개념일지라도 함축된 의미는 깊고 크다. 이미 가속도가 붙은 문명의 브레이크에 필요한 기제로서 최소한의 폭력이 적용 되었어야 했다. 뒤늦은 지금 그런 말을 하는 자체가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그 길은 명백하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명주실을 얻기 위해 우화되기 전에 죽여야만 하는 번데기들에 대해 당연하다는 생각은 올바르지 않다. 뭇 생명에 대한 연민과 우주적 경외. 그것을 본래 마음의 중심에 갖고 태어난 인간들은 그 동안 문명의 거친 발걸음에 속아왔을 뿐이다. 두 번 이상 오는 기회들도 있지만 한번뿐인 기회가 있다. 지구의 현재 모습은 무수한 증거들로 그것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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