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나이가 들면 야생의 본능이 살아나는 걸까요?

호피무늬 가방을 하나 샀지요.

예전엔 얼룩덜룩하면서 뭔지 야한 듯도 한 호피무늬에 관심이 있기는커녕, 조금은 이유 없이 혐오하기까지 했더랍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호피무늬가 눈에 들어오네요. 급기야 호피무늬 가방까지 하나 사게 되었지 뭐에요.

들판을 맘껏 포효하던 야생 호랑이의 기운을 받고 싶다는 은연중의 생각이 호피무늬 물건의 구매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또한 그것은 이미 내 안의 기운이 그만큼 소진되었다는 역설은 아닐런지요.

이제 몇 달 후면 또 한 살의 나이를 먹겠지요.

쉰이 넘는 나이는 하늘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는 나이라는데 하늘의 이치는커녕, 하루를 별 탈 없이 넘기는 것에 안도하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이 눈에 보이네요. 모든 면에서의 안전주의는 좋은 것을 보아도, 싫은 것을 대해도 그저 덤덤히 넘겨버리는 무사안일에 빠지게 하지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좋은 것은 확실히 좋다고, 싫은 것은 분명히 '아니요'했던 나인데 말입니다.

이런 현상을 달리 해석해본다면 이제 나이 먹어 '좋은 게 좋다'고 모서리가 깎여나가 둥글둥글해졌다는 긍정의 해석도 가능하겠지요. 어디든 날을 세우지 않고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덤덤함이 그저 적당한 매너리즘을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치열하고 명징했던 모습이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어떠한 문제도 그저 대충 해결하려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을 보거나, 꽃을 보거나 시원한 물 한잔을 보아도 깜짝 놀라 스스로에게 물었다던 그리스인 조르바, 날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을 대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속의 주인공이 떠오릅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상이 그에게는 날마다 새롭게 시작되고 그를 통해 세상은 활기와 온기를 되찾지요. 조르바를 통해 세상은 원래의 신선함을 회복하고 무덤덤해진 일상이 산뜻함으로 다시 시작되지요.

어쩌면 호피무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런 무덤덤한 일상으로부터의 탈피, 더 나아가 호랑이처럼 펄펄한 기운을, 조르바처럼 '모든 것을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네요.

이유 없이 적대시했던 호피무늬가 이제는 눈에 들어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겠어요. 그 야생의 울림에 귀 기울여보아야겠어요.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모든 것이 나른한 신의 손에서 풀려나, 세상이 원래의 신선함을 되찾게 했던 조르바를 기억하며 호피무늬의 도전성을 새롭게 받아들여야겠어요. 그렇게 끝까지 가는 거에요. 나이와 관계없이, 끝까지 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니까요. 늘 새롭게 도전하며 말이에요.

호피무늬 가방을 손으로 쓸어보며 넘치는 기운을 몸으로 담아봅니다. 내일의 발걸음은 더 씩씩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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