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혼자 커피 마시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예민하지 않아도 되고 공간과 시간에 제약 없는 자유로운 여유를 즐긴다. 커피는 오감의 즐거움이 있다. 몸을 덥혀주는 향기, 서버로 떨어지는 추출물의 맑은소리, 방울방울 떨어질 때 각각의 빛을 구분하는 예리한 시각, 맛의 섬세함, 찻잔의 온기다. 오늘 커피는 호박(琥珀) 빛이다. 첫물은 늙은 호박 빛이더니 검붉은 수수 빛으로 고였다. 琥珀은 마고자에 달아 품격을 높여주는 장신구로, 투명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되 도도한 빛은 이끌림이 있다.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커피도 함께 마실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데 베란다 창틀에 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왔다. 날개를 털기도 하고 좁은 곳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잘 논다. 가끔은 집안을 쳐다보는 듯하다. 부리를 유리창 가까이 대고 갸우뚱거린다. 친구에게 생중계하듯 비둘기 행동을 전하며 지켜봤다.

그런데 움직임이 수상쩍다. 내가 있는 쪽으로 꽁지를 돌리며 뒤뚱이더니 배설물을 힘차게 쐈다. 순간 행복한 교감은 엉망이 되었다. 앉았던 곳을 보니 까만 흔적이 보인다. 친구는 똥 맞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소설을 인용하며 유쾌하게 웃었지만 나는, 꽁지를 들썩이며 통통한 속 털 사이에서 쏟아지던 액체만 생각나서 괴로웠다.

며칠 후 택배가 왔다. 똥 커피 보낸다. 기겁하지도 날 부르지도 말기. '르왁'이 '으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친구 메시지다. 부르지 말라는 말이 거절이 아닌 배려가 되어버린 지금, 이해하면서도 씁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밥이나 혼술하는 사람들을 선입견으로 바라보았다. 공동체 생활에서 홀로 행동은 이해보다는 부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일부 정치인은 불통과 독선의 이미지로 굳어졌다. 마스크 쓰기와 손 씻기, 거리 두기의 코로나19, 함께하는 情에서 떨어져야 하는 獨이 어색하지 않다.

추석 거리 현수막에서도 변화가 보였다. 추석이 다가오면 흔하게 보았던 문구들이 있다. '즐거운 추석명절, 고향 방문을 환영합니다.' '가족과 함께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축, 제 ○회 ○○초등학교 총동문회'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반기었다.

올해는 오지 말라는 부탁을 위트로, 함께 보다 가족을 위하는 덕담과 방역수칙 현수막으로 바뀌었다. 부모님께 가는 자식은 불효자가 된다는 '불효자는 '옵'니다.', '이번 추석에는 안 와도 된다. 마음만 보내라.', '추석 연휴 귀향, 모임 자제', '이동 없는 간소한 추석 동참해주세요.'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자제의 부탁을 알고 비대면에 익숙한 젊은이는 현실을 보지만, 보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나눠주고 싶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고향 부모님은 들녘에 익어가는 곡식을 먼저 본다. '코로나 극복 후에 만나자.' 기약이 아닌 마음 가는 대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날이 언제일까, 커피 마시면서 생각에 잠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