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사어(死語)들도 있고 잘 쓰여지지 않아 잊혀지는 듯한 말도 있다. 퇴고라는 말 역시 내겐 그렇게 보인다. 글 쓰는 사람들이나 그에 관련된 사람들에겐 지금도 중요한 말이 퇴고이다. 그 말이 일상에서도 곧잘 쓰이던 시절도 있었다. 퇴고의 유래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에 설레임이 인다. 당나라 시인 가도는 나귀를 타고 가다가 시 한 수가 떠오른다.

'조숙지변수승퇴월하문(鳥宿池邊樹僧推月下門)'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자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밀다라는 뜻이다. 가도는 문을 밀다(推, 퇴)보다 두드린다(敲, 고)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며 가다가 한유와 마주친다. 당시의 문장가 한유는 두드린다(敲)가 낫겠다고 말한다. 같은 문을 두고 밀다와 두드리다 사이에 무엇이 나은지 계속 고민하는 가도. 밀다(推)와 두드리다(敲). 단순하다면 단순한 그 두 말이 각기 열어나가는 세계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굉장히 다르다. 감수성이 강한 사람들에겐 그 각기의 말이 자아내는 차별적인 풍경들이 느껴질 것이다.

퇴고는 목수의 대패질과 같은 면도 있다. 그러나 대패질은 끝이 있다. 목재가 실용이나 예술적 차원에서 완성되거나 물리적으로 더는 깎일 수 없는 상황이 끝이다. 퇴고는 대상이 물건이 아니어서도 근본적으로 끝이 없다. 수행과 명상에 끝이 없음과 비슷하다고도 생각된다.

글쓰기를 해온 나는 퇴고를 할 때 검정 펜으로 하다가 언제부턴가 색이 있는 싸인펜으로 주로 하게 되었다. 글을 수정해 나갈 때의 순간순간의 기분으로 초록색을 들거나 주황, 보라, 연두색을 든다. 마음이 침울하거나 비장할 땐 검은색을 든다.

퇴고하는 방식의 변화가 생기면서 마치 그림을 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언젠가는 원고 수정을 마무리한 뒤 맨 끝장의 글씨 위에 간단한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이 하나, 둘 다른 그림들로 이어져 그림책 비슷하게 된 적도 있었다. 퇴고가 그림을 촉발하고 그것이 모이고 모여 또다른 장르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림은 나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또하나의 세계이다. 퇴고가 그것까지 점화를 시킨 셈이다.

뜻밖의 선물마저 준 퇴고는 일상의 이면에도 도사려 있다. 매일 쓰는 스마트폰만해도 그 안엔 과학과 기술, 공정이 무수한 시행착오의 퇴고의 축적 위에 있다. 그에 따른 편리 위에서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함양을 위해 절실한 퇴고는 상실되다시피 되었다.

퇴고 없는 글과 말은 깊이가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 피상성의 난무가 정치판과 언론판에서 뿐아니라 그것들을 비판하는 시민들에게도 있음은 애석한 일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은 숙고의 계절이기도 하다. 심사숙고(深思熟考)라는 말도 쓰인다. 그 네 글자를 뜯어보면 물과 마음, 불이 들어 있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논지에서 좀 비껴나지만 물 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있다. 주역에 깃든 뜻 중 하나이다. 그것이 칼 융의 아니무스, 아니마까지 이어짐은 마음의 퇴고와 숙고를 조금만 거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일상 쓰는 도구들에 도사린 퇴고에만 성찰의 눈을 뜨더라도 상실되다시피한 퇴고의 가치를 부활시킬 모티프가 발견되며 가슴에 끌이나 조각도가 생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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