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2020년 11월 21일은 박용래(朴龍來, 1925~1980) 시인이 작고한 지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박용래 시인은 충남 논산시 강경읍 출신의 서정 시인으로 명문교인 강경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일본에서 귀국한 김소운과 박목월을 찾아다니며 문학을 배웠다. 그리고 그는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과 중학교 국어과 준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대전과 충남의 중학교에서 상업과 국어를 가르치면서 취미로 문학수업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학생들에게 수업료 납부를 독려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교직을 그만두고 대전 중구 오류동에 자택인 청시사를 마련하고 창작에 전념했다.

1946년에 정훈, 이재복, 박희선, 하유상, 원영한 등 향토문인들과 동백시인회를 조직하여 동인지 '동백'을 간행했다. 1955년에는 현대문학 6월호에 '가을의 노래'로 박두진의 첫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황토길', '땅'을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69년에 박목월 시인의 도움을 받아 첫 시집 '싸락눈'을 상재했다. 1971년에는 한국시인협회 주선으로 한성기·임강빈·최원규·조남익·홍희표 등의 시인과 함께 동인시집 '청와집(靑蛙集)'을 출간했다. 1975년에는 제2시집 '강아지풀'을, 1979년에는 제3시집 '백발(百髮)의 꽃대궁'을, 1983년에는 유고 시 전집 '먼 바다'를 발간했다. 산문집으로는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1985)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저녁눈', '겨울밤', '오류동의 동전', '담장' 등을 들 수가 있다.

1961년에는 제5회 충남도 문화상을, 1969년에는 현대시학사가 제정한 제1회 작품상을 수상하였고, 죽은 뒤 1980년에는 한국문학사가 제정한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다.

박용래 시인의 작품 세계는 전원적·향토적 서정의 세계를 섬세하고 간결하고 청각적이고 시각적인 언어와 고도로 치밀한 내용과 형식으로 심화 확대시키고 동양적 여백의 미를 추구하여 짧은 시행, 반복과 병렬구조, 전통적인 민요조 리듬, 명사나 명사형 어미를 주로 사용함으로써 깊은 서정적 여운을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박 시인은 평소에 사소하고 하찮은 모든 것들을 보고 체험하면서 술과 시에 취해 눈물을 많이 흘려 '눈물과 정한의 서정 시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자연적 서정주의 시 세계를 개척하여 1950년대 전후사가 안고 있던 허무주의와 감각주의를 극복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경제적으로 무능하여 늘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유분방했고 세속적인 욕심 없이 불교적 삶을 영유했다.

1974년 한국문인협회 충남도 지부장에 피선되어 충남·대전·세종시의 시문학 발전에 많이 기여했다. 그리고 대표작인 '겨울밤'이 중학교 2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대표 시집인 '싸락눈'이 고등학교 2학년 문학교과서에 게재되어 한국 문학 발전에 많이 기여했다. 그리하여 박용래 시인은 한성기 시인, 임강빈 시인과 함께 대전의 3대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박 시인은 1980년 11월 21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55세를 일기로 별세해 충남문인협회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1984년 10월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저녁눈'이 새겨진 박용래 시비가 건립되고 1996년 논산공설운동장에도 '겨울밤'이 새겨진 박용래 시비가 건립되었다.

박용래 시인의 40주기를 맞아 둘째 딸 박연 화가가 테미오래 1호 관사 '역사의 집'에 마련된 작은 미술관에서 오는 11월 30일까지 시화전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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