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키 큰 나무들이 바람에 스치며 내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린다.

'하늘' 가는 길은 모두 이렇게 아름다운가. 단풍이 절정에 이른 길을 따라 '하늘재' 길로 나섰다. 나무들은 이제 따사로웠던 봄날의 기억도, 무성하게 잎을 드리웠던 초록의 순간도 조용히 갈무리하며 붉은 빛으로 자신의 몸을 정리한다.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고난을 견딜 채비를 한다.

숲길을 홀로 걸으며 가장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는(사실은 새 생명의 잉태이지만) 나무들을 보며 나는 어느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생각을 해본다.

작년에 아흔의 연세로 작고하신 친정아버지의 삶을 생각해 본다.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 그 고장의 수장으로서 끝까지 청렴을 지켜낸 친정아버지는 지금도 그 지방에서는 존경받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려진다. 대쪽같은 성격에 절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강한 자에 강하게 약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웠던, 끝까지 당신의 신념대로 삶을 이끌어 가신 아버지의 모습에 나를 비추어본다.

늘 반주를 곁들이는 애주가이셨지만 한 번도 술 때문에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고 감정도 언제나 절제 되어 있어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으셨다. 다소 무뚝뚝하지만 멋과 풍류를 아는 멋쟁이시기도 했다.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한 잔 술에 김동환의 시에 곡을 붙여 박재란이 부른 '산 너머 남촌에는' 이라는 애창곡 18번지를 비록 음정 박자 놓칠지라도 멋드러지게 부르시고 때론 나옹선사의 시를 낭송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도 하셨다.

운동 매니아셨던 아버지는 일흔이 넘는 연세에도 연식 정구를 즐겨하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무릎 연골에 문제가 생겨 인공관절 수술을 권해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젠 몸도 다 써먹을 만큼 써먹어서 그런 것을 억지로 바꾸고 싶지 않다며 그냥 받아들이시겠다 고집하셔서 자식들이 어찌 할 수 없었다. 아버진 그렇게 자연스럽게 노화를 받아들이셨다. 삶의 순리에 따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청정한 정신을 놓지 않으시고 당신이 평생 일구셨던 집안에서 아들 며느리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구순의 삶을 자연사로 마무리 하셨다.

나는 홀로 걷는다. 아름다운 오색의 단풍들을 따라 하늘재 길을 오르며 이제는 죽음을 향해가는 삶을 생각한다.

절대 고독 속에 홀로 걷는 길은 누구와 경쟁하며 가는 길이 아니다. 삶이란 누구와의 경쟁이 아니라 매 순간 자기와의 싸움이 아닐까. 남들보다 더 많은 걸 갖고자 하는 것에서 오는 탐욕,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오는 좌절, 결국 모든 일은 그것을 채우려는 욕심과 그것을 비워내려는 또하나의 마음이 끊임없이 경쟁하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거기까지 생각을 미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의 삶이 성공적이었다면 아버진 당신의 삶을 당신의 신념 속에서 모든 걸 순리로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해탈함이었으리라. 모든 걸 순리로 받아들일 줄 아는 여유, 내가 남들보다 덜 가졌다면 그건 나에게 주어진 순리. 남들이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가진 것을 넘볼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 아끼고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몸소 보여주신 삶의 철학이었으리라.

붉게 물든 아름다운 단풍들은 남을 시새우지 않고 다만 고요히 자신의 몸을 정리하고 있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그 몸속에 새 생명을 잉태하듯, 내 몸속에도 아버지의 삶이 고요히 스며들어 새로운 생명으로 또 그렇게 세대를 이어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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