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요즘 커피에 푹 빠져있다. 알맞게 볶아진 커피 원두를 구해 잘게 갈아 거름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원하는 농도의 커피를 추출하는 핸드드립 방식을 익혔다. 커피를 내리는 것도 다도(茶道)의 일종이어서 그런지 마시는 즐거움 보다 다소 번거롭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적지 않다.

운명적 만남이라고나 할까. 커피콩을 수동 분쇄기에 넣고 핸들을 돌리는 순간 아주 먼 열대의 고산지대에 쏟아진 햇볕 몇 줄기, 가지를 흔든 비바람 몇 가닥, 차고 기울던 달이 스미던 수백일의 밤과 이슬 맺힌 아침을 담고 있는 콩이 깨어지는 소리 '사가각'. 향을 긁어내는 물소리 '조르륵'. 단지 향을 느끼고 맛보는 것만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이 몰려왔다.

이제까지 취미가 무엇이냐는 설문란을 비워두기 민망하여 독서라고 썼지만, 이제는 그런 고민없이 자신있게 '커피내리기'라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커피를 내리는 즐거움을 누리다 보니 기왕 하는 김에 커피 전문가가 되어볼까 하여 바리스타 자격증 취득을 잠시 고민하였다. 하지만 마냥 행복한 이 기분이 반감될까 생각되어 그냥 즐기기만 하는 비공인(?) 바리스타로 남기로 했다.

조선말 서양인들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커피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음역하여 '가배()'라 불렀다고 한다. 카페인이 흔치않았던 시절 커피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차의 색이 검고 그 맛이 매우 쓰지만 마시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기에 서양의 탕약이라는 의미로 '양탕국'이라고도 부르며 실제 약용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누가 한국에서 커피를 처음 마셨느냐에 대하여는 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최초로 즐겨 마셨던 사람은 고종황제였다는 것에는 이론이 없는 듯하다.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버린 위태로운 정세나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아버지나 아내마저 믿기 어려웠던 고종이 느꼈던 커피의 첫 맛은 쓴맛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쓴맛을 극복한 후 감도는 고소함은 쓰러져가는 조선을 지키던 고종에게 많은 감상을 갖게 하고 개혁군주로서의 의지를 다지게 해주었을 것이리라. 고종에게 커피는 단지 음료로서 맛이나 효능 그 이상의 의미였던 것같이 필자에게도 커피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커피를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을 앞두고 밤을 새기 위해 각성효과를 가진 '양탕국'으로써 커피를 처음 접하였다. 당시 시험을 앞두고 탕약 마시는 기분으로 들이마셨던 쓰기만 했던 커피는 세간에 알려진 만큼의 각성 효과를 필자에게 주지 못했지만 시험을 앞두고 커피를 마시는 것은 비로소 공부를 해보겠다고 다짐하는 자율적 동기부여 선언같은 나름의 의식이었다.

대학에 이르러서도 커피는 '양탕국' 각성제이긴 하였으나 그때부터 서서히 '가배'로서의 로맨틱한 기능에 눈을 떴던 것 같다. 매일 밤 도서관 휴게실에서 짬을 내어 친구들과 눈빛을 나누며 마시던 싸구려 자판기 커피는 단순한 고시생활에서 몇안되는 행복한 루틴이었고, 아직도 그때의 행복을 잊지 못한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고시준비에 고단했던 나에게 주는 조그만 휴식이자 포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커피는 늘 깨어 미래를 준비하라는 정신의 각성을 촉구하는 조촐한 기도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중년에 접어들어 고향에서 변호사로 자리잡은 지금도 여전히 커피는 쓰다. 이제 그 쓴맛 뒤의 각성효과를 기대하거나 미래를 꿈꾸는 나이도 이미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커피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을 즈음 커피콩을 잘게 분쇄하고 온수를 붓는 지금의 행복을 발견하였다. 단순한 커피의 감상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고 발견되는데 더 복잡한 인생은 어련하랴. 분명 인생을 버티다 보면 미처 몰랐던 다른 행복도 발견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긴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변호사의 일상은 매일 승패가 엇갈리는 전쟁이다. 격앙된 의뢰인들과 적절한 감정의 거리두기에 실패해서 같이 분노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감정의 웅덩이에 빠질 것 같을 때면 커피콩을 갈아 물을 붓는다. 격렬한 전쟁을 배경으로 여유로이 커피를 내릴 수 있으니, 커피를 가히 안정의 묘약이라 부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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