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여름이 지날 무렵, 텃밭에 무씨를 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밭에 가 보고 깜짝 놀랐다. 모종으로 심은 배추는 그렇다 치더라고 겨자씨만한 무 씨앗을 심었는데 밭은 온통 초록빛이었다.

무는 계절도 토양도 탓하지 않고 어디서든 잘 자란다. 세세한 보살핌이 없는데도 금세 자라서 튼실하다.

무는 가을무가 단단하고 맛있다. 지상과 땅속에서 조화롭게 상생하며 밑동을 꼭꼭 여물게 했을 테다. 고향 집 채마밭이 그리워서일까. 무에 묻은 흙냄새가 좋다. 땅속 무를 쑥 뽑아서 쓱싹쓱싹 대충 닦은 다음에, 한입 베어 물면 사근사근하면서 시원한 단물이 입안에 꽉 찬다. 서걱서걱 무, 가을의 향기와 그리움이 함께 몸속으로 들어온다.

육질이 단단한 무를 깍둑썰기한다. 단물이 뚝뚝 배어 나온다. 요즘 세상에 제대로 된 단맛내기가 어디 쉬운가. 설탕의 인위적인 맛이 아니라 입에 넣는 순간 녹아내리는 맛을 낸다는 것이.

학교 다닐 적 동그란 소시지나 계란 프라이는 꿈의 반찬이었다. 무생채나 깍두기일 때가 많았다. 어느 때는 국물이 흘러 책이며 공책에 묻어서 난처하기도 했다. 그래도 무를 빼고 한 시절을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친근하다.

1910년대 쓰인 반찬등속 조리서에 보면 깍독이(깍두기)가 있다. '무를 미모가 반듯하게 조그맣게 썰어서 소금에 절이고 고추와 마늘을 난도하여 소금물에 범벅 하여 물을 만들고, 무 썬 것을 한데 하여 놓고 생강을 잘게 채쳐서 섞고 또 조기를 난도하여 많이 넣어라.' 양반가의 조리법이긴 하지만 깍두기에 조기를 넣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무가 우리 식탁에 오른 지도 오래되었음이다.

깍두기는 너무 커도 먹기가 힘들고 작으면 먹는 맛이 나지 않는다. 취향에 맞게 적당한 크기로 자른 무에 고춧가루를 넣자 빨갛게 스며든다. 생채나 깍두기를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싸준 까닭도 바쁜 농사철에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반찬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어머니는 생선을 싫어하셨다. 각종 생선조림에 제 색깔 변해가며 주재료를 돋보이게 하는 무보다는, 무만 숨벙숨벙 삐져서 들기름에 달달 볶다가 고춧가루와 간장으로 맛을 내고 멸치 국물을 낸 뭇국을 자주 끓이셨다. 한겨울 두 손 꽁꽁 얼고 몸을 움츠리며 들어와 온돌방에 앉아 따끈한 뭇국을 먹으면 얼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국 요리에 들어가는 무는 국물 맛을 깔끔 시원하게 하고 소화효소인 디아스타아제가 많다. 동치미 국물은 체했을 때와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 지방을 소화하고 분해를 촉진하는 효소가 함유되어 있어서다. 제사 때 끓이는 탕국에도 무가 큰 역할을 한다. 과식해도 배탈 난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들판에는 배추와 무만 남아 텅 빈 밭을 초록빛으로 지킨다. 무는 뽑아서 무말랭이를 만들 테다. 또각또각 잘게 썰어 말리면 쨍한 숲을 지나 온 바람이 꼬들꼬들 맛깔난 무말랭이를 만들어 주리라. 겨우내 매콤달콤하게 반찬으로 먹고 차로 우려서 향기를 맡아야지.

제 몸 물들여 깍두기는 이미 완성되었고, 어머니의 뭇국이 그리운 나는 숨벙숨벙 무를 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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