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꽃다리에서 시청으로 뻗는 차도에서였다. 운전대를 손에 쥔 지인은 안절부절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신호등 두 개가 괴롭혔다. 하나는 빨간 불이고 다른 것은 파란 불이다. 신호등들의 위치와 각도가 애매한채 각기 자기를 따르라는듯 빛을 뿜었다.

"대체 어떤 걸 봐야 하는 거야?"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급한 결정을 내려야 할 그가 물었다. "진짜 헷갈리네" 나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황당하면서도 화가 났다. 이곳은 청주에서 복잡한 육거리 시장 앞이다. 신호등들이 정확성 없이 분잡하게 설치돼 혼선을 주고 있었다. "이거 사고 유발 아냐?" "공무원들은 대체 뭐하는 거야? 교통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방치하지?"

우리는 용케 빠져나왔지만 떨떠름함을 넘어 불길한 사고가 언젠가 날 것만 같은 기시감에 치를 떨었다.

현대 철학에서 중요한 인물로 미셀 푸코가 있다. 그는 한동안 유럽 사상사를 선두에서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던 무렵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진다.

전세계의 지식인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 사상사의 사막에서 그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길을 내고 있었다. 푸코 자신도 그렇게 여기다가 만약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길이 아니라면! 자중지란에 빠진 것이다.

법무부 장관, 검찰 총장, 사법부의 선택 및 결정이 어우러져 나라의 혼란을 극대화하고 있다. 국가적으로 특별 국면에서의 선택들이 중요하듯 시대를 이끄는 사상가들의 판단 역시 중요하다. 그 영향은 범세계적이며 문명의 미래까지 좌우한다. 데카르트만 해도 근대화를 연 선각자라는 칭송과 동시에 생태계 파괴의 사상적 원조라는 비판을 받는다. 푸코는 그런 절대적이며 실존적인 늪에 빠진 것이다.

그 늪에서의 진저리 치는 고뇌 역시 푸코의 사상 못지 않게 나는 높이 산다. 그는 적어도 방향을 쉽게 잡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서 있는 선을 고수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쌓아온 축적물을 송두리째 버릴 심정으로 처절하게 고뇌했다. 우리나라에 허다한 적당한 지식인들의 궤변이나 성찰 부족의 아전인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각도는 방향이기도 하다. 육거리 시장 앞 위치와 각도에서 혼란을 야기하는 신호등은 이 처절한 방향 갈등의 사상사적 고뇌와 질적으로 다르다. 물리적으로 손을 대면 금방 효과가 난다. 정확하지 못한 위치는 바로 잡으면 되고 정밀성을 잃은 각도는 고치면 된다.

나의 지인이나 나만 불안과 공포를 느꼈을 것 같지 않다. 그 차도를 지나던 운전자들 중에 꽤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처음 운전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단순하면서도 생사를 갈라놓는 마귀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어찌 이 뿐이랴. 그것은 차라리 우리나라 곳곳에 즐비한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들의 방치에 대한 은유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우리는 지금 국내와 국제적으로 방향들이 엇갈리는 혼돈 속에 올바른 방향 설정조차 힘든 세월을 살고 있다. 그런 것에도 고통을 앓는데 기술적으로 뚝닥 고치는 일임에도 방치된 결과 그 차도를 달릴 때면 머리가 쭈삣 서다가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곤 한다. 빠른 시정이 그 담당 부서를 역시 보호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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