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여든넷의 어머님이 멀리 있는 은행 일을 손수 보시기 힘드셔서 날 좋은 날 모시고 나섰다. 아파트 내에 있는 자동화 기기에서 찾아 쓰시면 좋으련만 시력이 좋지 않으신 팔순 노모에게 키오스크 사용은 먼 나라 이야기다.

그날의 일정은 동네 은행에 들러 통장을 개설하고 주민센터에 가서 기초연금 지급 통장을 변경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1시간이면 될 줄 알고 나선 길이었지만 처음부터 난관을 만났다. 신규로 통장을 개설하려 하니 통장개설 목적이 명확해야 한단다. 필요서류에 대한 안내가 적힌 커다란 현수막을 가리키며, 소위 대포통장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 내가 어딜 봐서 대포통장이나 만들 사람으로 보인단 말인가. 여기서 처음 마음이 상했다.

그길로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통장개설에 필요한 증명서를 떼어줄 수 있는가 물으니 담당자를 정확히 지정하래서 노인복지담당자를 바꿔 달라자 자리에 없다고 직접 연락을 준단다. 증명서를 뗄 수 있는지만 알면 되었는데 또 기다려야 했다. 급한 마음에 그 새를 못 참고 주민센터로 달려가니 생각보다 금방 해결되었다. 씩씩거린 것이 머쓱할 정도로. 다시 은행으로 돌아와 통장을 개설하면서 체크카드 발급과 인터넷 뱅킹 신청을 하니까 또 묻는다. "어머님이 체크카드는 왜 만드시죠?" 아, 이 질문에 두 번째 마음 상함. 그래서 "시장에서 쓰시지요"하려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 안하면 안 만들어주나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럼, 뭐하러 질문했을까.

통장개설하고 체크카드를 만드는 동안 그들 눈에 나는 노모의 돈을 탐내는 이상한 며느리로 보이는 듯했다. 옷을 잘 입고, 머리도 만지고 갈 걸 그랬나. 흠, 믿음직한 얼굴을 보여주지 못하는 마스크 때문인가? 쓸데없는 생각까지 든다. 어쨌든 일을 마치고 통장개설 기념으로 며느리가 용돈을 넣어드린다고 큰소리치며 돈을 입금하려는 데 안된다. 세 번째, 욱한다. 왜 또 안되는가. 전화를 걸어 물으니 입금은 정부지원금만 된단다. 입출금이 자유롭지 않은 통장이었다. 맞다. 강의할 때, 기초연금 등 기본생계비에 해당하는 지원금 통장은 압류방지를 위해 거래가 제한되어있다고 늘 설명해왔다.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힌 사회복지사는 그 통장으로 거래를 하려 했다. 헛똑똑이다.

다시 차에서 내려 현금을 찾아다 드렸다. 좀 알아보고 갈 걸 그랬다. 세상이 이리 변한 것을. 20세기 경험으로 21세기를 살아가려니 만만치 않다. 두 배의 시간이 걸렸지만, 어머님이 직접 하러 다니셨다면 하루는 족히 걸리셨겠지 싶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상황이 씁쓸했다. 보이스피싱이나 금융사기가 얼마나 일어나기에 이렇게 철저해진 것일까. 노부모의 돈에 손을 대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기에 이리된 것인가. 모든 절차의 시작을 의심으로 대해야 할만큼 심각한 상황이란 말인가. 바꿔말하면, 사회가 정말 촘촘해진 것 아닌가. 신뢰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2차, 3차 인증으로 사고를 예방할 수 있도록 안전해진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절차를 수행한 당사자인 나와 어머님은 왜 마음이 계속 상했을까.

나선 길에 어머님이 이용하시는 은행을 모두 정리해서 한 군데로 돈을 모아드렸다. 그동안 흩어져 있는 돈에 마음이 쓰이셨는지 어머님이 정말 기뻐하셨다.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성질 급한 욱하는 며느리랑 다니기 힘드셨을 텐데도 혼자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며 연신 고마워하신다. 절차와 과정의 중요함을 잘 알지만 정보접근성이 낮은 어르신, 장애인 등은 어떻게 21세기를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우리 직업이 필요한가보다. 한 번 겪었으니 다음에 다른 일을 만나면 더 슬기롭게 대처하리라. 이로써 나에겐 강의 콘텐츠가 하나 더 생겼다. 직접 겪었으니 말로만 할 때랑 다르겠지. 다음 학기는 이 이야기를 강의실에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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