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찬바람이 매섭다. 그래도 하늘은 푸르다. 추위가 온몸을 파고드는 사이에 해가 바뀌었다. 코로나로 침묵의 일상을 지내왔다. 모든 것은 멈추었고, 그 자리에서 자신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가끔 햇볕이 내리쬘 때는 교정을 거닐어 본다.

학교 현관 앞에 조그만 숲이 있다. 의자가 있고 작은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 놓았다. 난 이곳을 참 좋아한다. 아직 나무가 덜 자라 숲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바라보기에 그저 좋다. 네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유심히 보았다. 봄에 잎이 나면서 나무는 연한 초록색으로 변신했다. 여름에 화살촉 같은 잎이 점점 커지면서 특이한 모양을 이루더니 가을엔 단풍이 되었다. 그것도 노란색이 아닌 진홍색의 붉은빛으로! 아, 그 곱고도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수종이 대왕참나무였다. 학교를 신축 이전하고 여러 나무를 심었는데 이곳에는 주로 대왕참나무를 심었다. 나무 둥치에 팻말을 떡 걸어놓고 설명도 해 놓았다. 그래서 이 나무가 대왕참나무인지 알았다. 처음에는 곱게 물들길래, 그냥 단풍나무인지 알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지난봄의 일이었다. 다른 나무는 모두 잎을 틔우는데 두어 그루의 나무가 잎이 나오지 않았다. 어, 이거 죽은 거 아니야? 실제로 죽은 나무가 꽤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좀 지나니 연초록의 잎이 시나브로 나왔다. 앗, 그런 것을! 자라나는 아이들도 그렇지 않은가. 성장의 속도가 다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한 방 먹었다.

지금은 한겨울이다. 동지는 한참 전에 지났고, 소한도 지났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대왕참나무 열댓 그루가 겨울바람을 견디며 교정에 서 있는데 아니, 나뭇잎이 그대로 있다. 모든 나무가 그런 것은 아니고, 몇 그루는 잎을 다 떨구었다. 이럴 수가! 속으로 엄청난 화두가 들렸다. 이 무엇인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불러 물어보기도 했다. 학생들은 별의별 답을 다했다. 나무가 힘이 세서, 영양이 부족해서, 저쪽은 그늘이라서. 물론 생태적으로 그럴 수 있다.

하도 궁금해서 네이버를 찾아보았다. 대왕참나무! 와, 이런 나무인지 몰랐다. 이게 마라톤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고 부상으로 받은 나무란다. 원래는 월계수라야 하는데, 독일에는 그런 나무가 없어서 그와 비슷한 이 나무를 받았다고 한다. 흔히 '오크'라고 하는 미국 참나무라고 한다. 이 나무가 잘 자라 서울 중구 만리동에 있는 손기정 체육공원에 우뚝 서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 대왕참나무는 겨울에도 잎을 그대로 달고 있을까? 앞에 '대왕'자가 붙어서일까. 아니면, 월계수처럼 고귀해서 차마 잎을 내려놓지 못해서일까. 떠나야 할 때는 말 없이 떠나야 하는 것을. 집착이 너무 강해서일까? 사람이든 나무든 놓아야 할 때 놓을 줄 모른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대왕참나무는 나에게 아름다운 작별을 일깨운다. 오래전에 와서 조그만 씨앗 한 줌 뿌렸으면 이제는 떠나야 한다고. 삭풍이 부는데도 그냥 매달려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중국 당나라 시대, 나무 위에서 늘 참선하던 조과 선사가 고을 태수로 부임한 시인 백낙천에게 말했다. 나무에 오르기도 어렵지만, 내려가기는 더 조심스러운 거라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