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아버지가 우리 곁을 멀리 떠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난 두 달 동안 꼬박 힘들었다.

아버지와 닮은 뒷모습만 봐도, TV에서 아버지와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만 봐도 눈물이 났다. 좀 더 잘해 드리지 못한 점과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게 자꾸만 떠올랐다.

자식이라곤 달랑 나 혼자였다. 이런 내가 혼자여서 다들 귀하고 부유하게 자란 줄 안다. 하지만 그러지 않다. 아버지는 이일 저일 많은 일을 했다. 그래도 살림은 늘 어려웠다.

아버지는 좋아하는 표현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도시로 일하러 갔다가 올 때에는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왔다. 바로 종합선물과자 세트다. 큰 상자 안에는 여러 가지의 과자가 들어 있었다. 아껴 먹던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그런 아버지는 형제 중 맏이였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면서 맏이의 무게에 대해 느꼈다. 무거웠던 아버지의 삶의 무게는 폐암을 앓으면서 조금씩 내려놓았다. 대신 하나뿐인 자식 걱정으로 무거웠으리라.

아버지는 아프기 전까지 끊임없이 일을 했다. 마지막 직장은 아버지가 그동안 한 일 중에서 제일 편한 듯싶었다. 딱 1년만 더 일하고 전국일주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곳에 몇 달 다니고 병원과 집을 오가며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로 점점 야위어 갔다.

아내랑 상의 끝에 우리 집 한 쪽을 수리해 아버지 방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방 만드는 공사를 보며 짐이 되기 싫은 눈치였다. 하지만 얼마 후 우리 집으로 오셨다. 가끔씩 치매 증상으로 엉뚱한 얘기를 하곤 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아버지는 걷기조차 힘들어했다. 난 힘을 내라고, 자꾸 안 걸으면 앞으로 누워만 있어야 한다고 했다. 친절하게 말해야 하는데 자꾸 목소리만 높였다. 마음과 다르게 따라주지 않는 몸을 보면서 아버지는 얼마나 답답하고 속상했을까. 그 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몸을 닦아드릴 때에도 "아들인데...."라며 미안해하던 아버지. 더 정성껏 닦아드려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힘든 건 아내가 도맡아 했다. 아버지가 정말 위험한 순간 아무도 못 알아 봤다. 딱 한 명 나만 정확하게 알아봤다. 아들이라고 경구라고. 그래서 더 많이 죄송했다.

2년 반 정도 입원과 수술, 퇴원과 요양원 등을 오가며 아버지는 끝내 우리 곁을 떠났다. 돌아가시기 전 말도 못하고 누워만 있던 아버지. 아버지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거의 두 달쯤 되는 날 꿈을 꾸었다. 그렇게 보고 싶던 아버지가 꿈에 나타났다. 단정하게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목이 쉬도록 크게 외쳤다.

"아빠, 천국 간 겨? 천국 갔냐고? 천국?"

아버지는 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왼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더니 하늘 위로 붕붕 올라갔다. 점점 빠르게 하늘로 올라가는 아버지는 나에게 눈을 맞춰주며 계속 손을 흔들어 주었다. 꼭 영화 같은 한 장면의 꿈. 그런 꿈은 처음이었다. 꿈을 깬 후 참 편안했다. 그날 이후 두 달 동안 달고 살던 눈물이 멈췄다.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년 되는 날 우리 가족은 각자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그리고 돌아가면서 아버지와 관련된 추억을 한 명씩 이야기했다. 우리는 편지 쓰는 게 참 좋다며 기일 때마다 편지를 쓰기로 정했다. 편지는 아버지의 유골함 옆에 놓기로 했다. 10년 후에는 편지를 가지고 와 서로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다 같이 읽기로 했다. 두 아들은 어떻게 썼는지 궁금하다. 아버지가 나 대신에 두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도 알려주며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많이 보고 싶네요. 그곳에선 아프지 마시고, 이젠 제 걱정도 하지 마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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