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노정(蘆汀) 김재철(金在喆)은 순종 1년인 1907년 8월 27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 아차실 250번지 안동김씨 가문의 부유한 천석꾼 가정에서 태어났다. 괴산공립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문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사범학교에서 교유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년 만인 1933년 1월 27일 서울 종로구 화동(花洞) 자택에서 폐병으로 서거했다.

그는 8~9세 무렵에 지은 한시가 전해져 올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난 신동이었고, 시와 희곡을 창작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멋진 청년 예술가였다.

영민하고 유머가 있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인정이 많고 사교적이어서 김태준, 이희승, 이숭녕, 윤태림 등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특히 그는 진보적 성향의 사회주의자인 김태준과 친했고 사회비판 의식이 강해 문학 작품과 학술 논문과 저서를 발표할 때마다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명이 짧아 26세를 일기로 단명했지만, 천재(天才)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한국 연극사, 꼭두각시, 탈춤 연구의 개척자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최초로 '조선연극사'를 저술함으로써 한국 연극사 연구의 선구적 업적을 남겨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이외에도 민요, 시, 소설, 김삿갓 등의 연구를 묶어 출간한'노정잡고'가 있다. 논문으로는'구개음화에 대하여', '조선어화의 조선어', '외사(外使)와 조선연극', '조선인형극 꼭두각시'가 있다.

한편 그는 1931년에 김태준과 함께 조선어문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사비로 '조선어문학회보'를 발간하여 장르 사에 기반을 둔 국문학의 구성 체계를 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오직 우리 문화의 재건만을 위해 문화운동을 전개하고 문학, 연극, 언어학을 넘나들며 공부하여 한국 국문학 연구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연구 대상이 극문학이라는 주변 장르라는 점 때문에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들어 국문학계에 희곡 연구가 활발해지며 지난 2002년에 김재철의 호를 딴 '노정 문학상'이 제정되는 등 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김재철의 생애와 업적에서 좀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술과 여자를 너무 좋아하고 과로하다 보니 폐병에 걸려 26세를 일기로 단명했고, 여러 편의 희곡도 창작했으나 전하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괴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주로 경성과 평양에 거주하는 바람에 아직까지 그의 고향인 괴산에 추모사업회가 조직되지 않아 이미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그의 고향인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 아차실은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집성촌으로 35가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들이 거의 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서 한 집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노정 김재철의 고향 생가가 20여 년 전에 이미 철거되고 그 자리에 비닐하우스가 설치되어 이제는 그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괴산군지'와'괴산인물지'에 그의 출생지가 괴산군 청안으로 기록되는 바람에 청천면의 대표적인 향토지인 '청천면지'에도 그의 생애와 업적이 수록되지 않아 매우 아쉽고 안타깝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문학평론가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그리하여 앞으로 '괴산군지''괴산인물지' '청천면지'가 수정 보완될 때에는 그의 출생지를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로 정확하게 기록하고, 추모사업회를 조직하여 그의 생애와 업적을 선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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