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사계절 자연이 온통 놀이터였던 어린 시절 천지 분별없이 논 밭길을 헤매고 다녔다. 소년은 아들 오형제 중 가운데 낀 그리 큰 존재감이 없었다. 위에서 명령하면 아랫사람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상명하복(上命下服) 군대식 상하관계 가족 분위기에서 자란 탓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던 단조로운 일상이 답답해 늘 시골생활을 탈피하고 싶었다.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꿈이 없는 학생시절. 그날도 짐짝처럼 이리저리 쏠리는 통학버스를 탔다. 옆 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찌든 땀내가 코를 찌르는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다 선배의 가방끈이 뚝 떨어졌다. 눈이 마주친 순간" 너 일요일 11시까지 우리 동네 교회 앞마당으로 와. 거기서 기다릴 테니까. "한 대 맞으려나 보다 걱정하면서도 하늘같은 선배의 약속 아닌 명령을 지켜야만 했다.

두렵고 떨리는 날이 다가와 고민하다 약속장소 근처에서 선배가 살고 있는 동네 쪽 길을 바라보았다. 선배가 막상 나타난 길은 예상했던 쪽이 아닌 교회당에서 나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소년을 반겨주었다. 험상궂은 얼굴로 마땅히 한 대 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잘 왔다며 갑작스레 그 안으로 데리고 갔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된 예배당이었다. 그 곳은 질풍노도 인생의 방황기에 있던 그를 따듯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곳이 되었다. 그 때부터 시간만 나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발걸음은 집 이상의 집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간 걸음이었지만 삶의 목표와 꿈을 찾은 전환의 여울목이 되어 신학공부까지 하게 되었다.

귀한 복(福)으로 신실한 아내를 만나 집안 내력인지 사내아이만 둘을 낳아 여전히 여자가 귀한 가정으로 살았다. 동서남북 분간이 어려운 영동의깊은 산골 마을과 보은(報恩)에서 농촌목회를 했다. 열정을 다해 청주에서 개척교회 목회를 하던 중 행복한 가정에 먹구름이 몰려 왔다. 면역력이 바닥으로 떨어진 아내의 건강에 이상신호가 온 것이다. 가난한 목회자에게 치료를 위한 약값을 감당하기에 터무니없는 한계가 있었다. 한창 자라는 두 아들과 아픈 아내를 생각해 새로운 삶을 모색해야만 했다. 결국 짧은 기간에 도제수업과 같은 기술을 익혔다. 이제 그는 욕실인테리어. 리모델링을 하는 타일기술자로 변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50여 년 전 통학버스에서 운명적인 만남 이후 그는 목사가 되었고 그 선배는 장로가 되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만난 것이다."나를 나 되게 인도해 준 선배님 가정을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 하고 있다."말한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그는 산삼이 있는 곳을 가자며 팔을 끌었다. 입으로만 하는 감사는 감사가 아니다. 고마움을 갚아야 한다며, 몸에 좋은 기운을 받으려면 따로 먹어야 한다고 산삼(山蔘)두 뿌리를 건냈다. 아내가 아팠을 때 치료를 위해 몸에 좋다는 약초를 구하러 온 산을 헤매고 다니다 심마니가 된 것이다. 유독 그의 눈에만 잘 보인다는 귀한 산삼을 난생 처음 먹었다기보다 그 속에 담긴 그의 사랑과 진심을 받은 것이다.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게다가 딸 부잣집 우리 아이들을 수양 딸 삼아 애틋한 정(情)이 오고 간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의 달란트로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는 봉사의 손길을 펼치며 살고 있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슈퍼맨처럼 나타나 뚝딱 해결 해 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진다. 소년시절 우연한 만남이 인생길 함께 가는 동역자로 오늘도 동행(同行)의 길을 걷는다. 하늘로 돌아 갈 그 날까지 황혼길 함께 걷는 평생친구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큰 복(福)을 누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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