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강추위가 몰아치다가 잠시 숨을 고를 즈음 속리산을 찾았다. 속리산은 마음이 무겁거나 번민이 들끓을 때마다 잠시 몸을 의탁하는 곳이다. 말 그대로, 속세를 떠난 산이니 이름마저 좋다. 속리산 하면 문장대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왕봉으로 길을 잡았다. 마음에 아련한 기억으로 천왕봉이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서 문장대를 바라보자!

세조길에 들어섰다. 세조길은 법주사 입구에서 복천암까지 이어진 길이다. 이 길이 생긴 후 속리산이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다. 왜 세조길인가? 조선의 7대 임금인 세조가 여기를 다녀갔기 때문이다. 세조는 여기를 두어 번 다녀간 것 같은데, 가장 확실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다. 세조실록 32권, 세조 10년(1464) 2월 27일 경술 첫 번째 기사에, '거가가 보은현 동평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에 머물렀다. 중 신미가 와서 뵙고, 떡 150 동이를 바쳤는데, 호종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는 이튿날인 2월 28일 기사에도 이어진다.

거가는 임금이 탄 수레를 말하고, 병풍송은 소나무 우거진 숲을 표현한 듯하다. 딱 들어맞는다. 아, 입구에 우뚝 선 정이품송이 있지 않은가! 어가가 지날 때 연 걸린다고 하자 그중 한 소나무가 가지를 번쩍 들었다. 참 신통도 하지. 세조는 그 소나무에게 정이품이라는 판서 벼슬을 내렸다. 오늘로 말하면 행정부 장관이다. 그런데 여기에 신미라는 승려가 등장한다.

신미, 그는 누구인가? 나는 이분을 파고들다가 책까지 냈다. 영화 '나랏말싸미'때문에 이분을 알게 되었는데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조선 초기의 사람으로 범어 등 언어학에 능통했다. 성균관 유생이었다가 아버지가 유배형에 처하자 출가의 길을 걷는다. 세종의 총애를 받아 26자나 되는 긴 칭호를 받는다. 그 중'우국이세'란 말이 있는데, 이는 나라를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뜻이다. 도대체 무엇으로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인가? 이를 두고,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의 숨을 공로자가 아닌가 하고 추정한다. 훈민정음에는 비밀코드가 숨겨져 있는데, 이 역시 신미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최시선 수필가·광혜원고 교장

세조는 왕자 때부터 신미를 스승으로 받들었다는 실록 기사가 있다. 왕위에 오르자, 신미에게 더욱 의지하여 속리산까지 오게 되었다. 오로지 신미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조선 중기 학자인 김덕겸의 '청륙집'에 의하면, 세조가 신미를 한양으로 불렀으나, 신미는 편지를 써서 오히려 세조를 오라고 청한다. 그 편지가 지금 전하는데 문장이 수려하다. 세조는 3일간이나 복천사에 머물면서 대법회에 참여한다. 이 이야기는 김수온이 왕명으로 쓴 복천사기에 자세히 전한다. 김수온은 대문장가로 신미의 둘째 동생이자 집현전 학사였다.

천왕봉에 올랐다가 다시 세조길을 따라 걸어 내려온다. 세조, 그는 왜 여기까지 왔을까. 혹자는 조카까지 죽인 나쁜 임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조길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거 하나, 우리의 문자인 훈민정음을 널리 편 것은 평가해야 한다. 그것도 신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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