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류시호 시인·수필가

교직에 근무할 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경주대 이강근 교수의 '종묘와 창덕궁의 중요성' 강의와 충북대학 이예성 교수의 '그림으로 보는 조선왕릉' 연수를 받으면서, 특히 왕릉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동안 서오릉, 서삼릉, 동구릉, 태릉, 광릉, 헌인릉, 융건릉 등을 방문했다. 그런데 조선 최고인 위대한 군주 세종대왕릉을 가보지 못하여 많이 아쉬웠다.

최근에 세종을 모신 영릉을 갔다. 조선왕조의 능은 한양에서 100리 안에 모셔서 왕이 하루에 참배를 갔다 오도록 했다. 그러나 세종대왕 영릉은 멀리 여주에 있으며 이성계를 모신 동구릉이 50만 평인데 비해 세종은 70만 평 넓은 땅에 있다. 경내에 들어서니 세종의 과학적 업적인 훈민정음 외에 천문관측 기구인 혼천의,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그리고 국가 제례에 사용하는 아악과 편경 등 악기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세종 28년에 세종의 부인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고,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아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세종 서거 후 20여 년이 지난 예종 1년에 여주로 옮겨 왔다.

영릉을 나와서 남한강이 흐르는 신륵사로 발길을 옮겼다. 이 사찰은 젊은 시절 직장 야유회를 다녀온 후 처음이다. 신륵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 전통 사찰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강변에 위치한 32만여 평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다. 고려 말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200여 칸에 달하는 큰 절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신륵사를 일명 벽절이라 부르게 한 다층 전탑이 묵묵히 여강(驪江)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에서는 그 옛날 시인 묵객들이 시 한 수를 읊고 있는 것 같다. 사찰 인근 강가 쪽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 있다. 나옹화상이 입적을 했고, 그의 석종은 1천20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부도 양식을 띠고 있다.

조선 후기 유명한 문인인 이색은 이렇게 노래했다. '천지는 끝없고 인생은 유한하니/ 호연히 돌아갈 마음 어디로 갈 것인가/ 여강 굽이굽이 산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절반은 단청 같고 절반은 시와 같구나.' 경기도 여주를 품고 흐르는 남한강 물줄기는 '여강'이라고 부른다. 선조들은 남한강을 삼등분해 상부를 단강(丹江), 중앙을 여강(驪江), 하단부를 기류(沂流)라고 했고, 선비들은 여강을 바라보며 강월헌에서 시를 읊고 여흥을 즐겼다.

류시호 시인·수필가
류시호 시인·수필가

신륵사는 7점의 국가 보물을 품고 있다. 이 사찰은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50곳'으로 선정되었다. 국가 보물 외에도 산속에 있는 절과 달리 강가에 자리하고 있어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여주에는 세종대왕릉과 신륵사, 남한강의 줄기 여강이 있어 나들이하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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