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드디어 터졌다. 긴 겨울을 견디며 올라온 몽우리가 고운 속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 육각형 청화백자 화분에 구근을 심은 지 석 달여 만이다. 두꺼운 구근 껍질을 뚫고 올라오느라 힘을 소진한 탓인지 엄지손가락 굵기의 백록색 꽃대가 가냘프다. 두어 뼘 크기로 자란 꽃대 끝자락에 우산 모양의 연분홍색 꽃이 세 송이나 달려있다. 아름다운 여인을 연상하는 아마릴리스꽃이다.

아마릴리스는 기다림의 꽃이다. 모든 식물이 다 그러하지만, 이 꽃은 기르기는 쉬워도 꽃을 보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오랜 시간 미동도 없다가 어느 순간에 응축된 힘을 발산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연인을 보듬듯 마르면 물주고 영양제를 뿌려주며 인고의 시간을 기다려야 꽃을 피운다.

여배우 같은 꽃이 아마릴리스다. 레드카펫 위를 걷고 있는 배우의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처럼 눈부시게 아름답다. 어느 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강렬한 색채를 지닌다. 꽃말이 '눈부신 아름다움'이란 이유를 알 것 같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꽃도 다른 꽃들에 비해 부족한 면도 있다. 화려함에 비해 향기가 덜하다. 또한 대나무처럼 단단하거나 유연하지 못하고 꽃대가 비어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식물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단점이 없는 완벽한 존재가 어디 있으랴.

식물을 기르며 많은 것을 배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 꿈을 이루는 꽃에 경외감을 느낀다. 인간은 이해타산을 따져 수시로 신의를 저버리지만, 자연을 피워내는 화초는 절대로 표리부동 하지 않는다. 꽃을 가꾸며 기다림과 인내심을 기른다. 사람을 대하는 법과 소중함을 깨달아 원칙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연을 관조하며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깨닫는다. 내가 먼저 상대를 진실하게 대하고, 그의 고충을 나의 일처럼 여기며, 내 기쁨과 슬픔처럼 느껴야 좋은 인간관계가 지속된다는 걸 흙냄새를 맡으며 알게 된 것이다.

아마릴리스가 백열등 불빛에 환하게 빛난다. 혼자 핀 모습보다 불빛과 어울리니 더욱 화사하다. 아마릴리스의 생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무언의 교훈을 내게 암시하는 듯하다. 인간이나 식물이나 삶의 방식이 결코 다르지 않다. 혼자 빛나는 존재는 드물다. 봄꽃도 정원의 꽃들과 더불어 피어날 때 향기를 더한다. 우리네 삶도 홀로 빛나는 것보다 안개꽃 속에 장미꽃이 어우러질 때 아름다운 것처럼 함께할 때 더욱 빛나는 게 아닐까. 식물에 양분을 주며 기다림으로 개화의 환희를 맛보듯, 힘든 세상살이도 이웃과 부대끼며 기다림의 철학을 배워야 행복해지리라.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강전섭 수필가·청주문화원장

창밖에 겨울을 녹이는 봄비가 잔잔하게 내린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로 마음이 고요하다. 빗소리는 활짝 핀 아마릴리스 꽃잎 너머로 새봄이 곁에 있다는 음률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머잖아 내게 위안을 준 아마릴리스 꽃잎도 질 것이다. 그때쯤 울안의 봄꽃들이 앞을 다투어 피어나리라. 나도 그 속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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