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최원영 청주 세광고등학교장

오늘은 4·19 학생의거를 기념하는 의미있는 날이다.

민주화 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4·19가 일어난 지 어느덧 60여년이 지났다.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이 한국현대사에 변혁의 주체였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3·1운동, 광주학생의거, 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특별히 4·19학생의거는 이 땅에 민주주의의 첫걸음을 내딛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불의에 분노하여 일으킨 학생들의 항거는 자유,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든 반독재운동이었다. 4·19정신은 70,80년대 군부정권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의 초석이 되었고, 선진국가로 발돋움한 원동력이 되었다. 경제발전과 민주화가 선진국에 이르는 두 개의 축이라고 할 때, 한국은 가장 짧은 시기에 이 목표를 달성한 국가로 주목받고 있다.

흔히들 혁명의 촉매가 되는 '분노'는 다음날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혁명의 열정에 들떠 혁명의 본래 가치를 구현하는데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냉철한 이성으로 혁명이 추구하는 정신을 제도화하고 체제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과연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며 성숙하게 운영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독선과 교만으로 상대방을 적폐로 규정하며 대화와 합의가 실종된 현재의 정치권을 볼 때, 성숙된 민주주의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언론 매체에 달리는 댓글에는 저주에 가까운 난폭한 글들이 일상사가 되고 있다. 견제와 균형의 기능을 감당해야 할 시민단체도 진영 논리에 빠져 그 역할을 상실한 경우가 종종 목격된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민주적 거버넌스가 무너진 지금의 상황에서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는 기대하기도 어렵다. 성숙된 민주주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숙의민주주의는, 시민이 공공의제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토론해서 결론을 도출하는 제도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 신고리 5,6호 원전 가동 문제로 시행해 본 사례가 대표적인 경우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정치는 다원적 인간들 사이에서 다양성을 전제로 한 의사소통 행위'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운영하는데 공존의 규범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 상대방의 주장을 존중하는 관용, 이 두 가지의 기본적인 자세를 갖고 공론의 장에 설 때 민주주의는 건강하게 성장한다.

겸손과 관용이라는 시민의 덕성(Civic virtue)은 유년기부터 훈련되고 내면화되어야 한다. 학교의 교육을 통한 민주시민교육의 선행이 필수적인 것이다. 균형 잡힌 정치행위를 훈련시키는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좋은 본보기다.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는 없다는 전제 하에 끊임없이 토론하고 합의점을 찾는 훈련이 민주사회를 향한 첫걸음이요, 숙의민주주의의 중요한 바탕임을 알아야 한다.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집단지성도 필요하다.

최원영 세광고 교장
최원영 세광고 교장

요컨대 깨어있는 민주시민의 힘이 요구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하던(묘비에도 새겨져있지만)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이 새삼 환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상생과 화해의 정신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구현해 가는 것, 거기에 4·19 정신의 진정한 승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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