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처음 그가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깜짝 놀랐다.

보일러가 또 말썽이다. 노후된 보일러관이 터져서 방바닥을 깨고 부분적으로 관을 교체하거나 때우기를 몇 번 째인지, 이번엔 아주 집안 전체의 보일러 관을 다시 놓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를 보게 되었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 동그란 무테안경을 끼고 주머니 많은 조끼를 입고 그는 우리 집으로 왔다.

보일러 관을 다시 놓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짐을 몽땅 들어내놓고 빈 집에서 하는 공사라면 좀 수월할 텐데 짐들을 어디 옮겨놓을 수도 없는 처지여서 우리 식구가 살고 있는 가운데 큰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큰일을 하는 사람은 달랑 두 사람이 전부였다. 청년은 나이가 지긋한 분과 함께 일을 했다. 막노동에 가까운 이 많은 일을 저 두 사람이 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청년은 이런 일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꽤 이지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기심조차 느끼며 나는 그를 지켜보았다.

청년은 매우 꼼꼼하고 침착하게 일을 해나갔다. 그는 나이 드신 분을 깍듯이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종종 '사장님'을 불러 무언가를 묻고 의논하곤 하였다. 그에게 무언가를 일러주는 사장님의 눈빛에는 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들을 나누는 모습은 자못 진지하고 엄숙하고 이상한 따뜻함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손발을 맞춰 일을 해나갔다. 무거운 짐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방바닥의 시멘트를 깨는 먼지 속에서도 그들의 몸놀림은 경쾌하고 가벼웠다. 마치 그 일들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 갈 때에는 깨끗하고 말끔하게 뒷정리를 해놓아 결벽증 있는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열흘 이상을 그들은 환상의 조화를 이루며 차근차근 일을 완성해 갔다. 힘들었던 일이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급기야 궁금증과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나는 그의 신상 명세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귀여운 조수였다. 막힌 하수구나 변기를 뚫어주는 일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곧잘 잔심부름을 돕는 착한 아들이었다. 방학이면 으레 아버지와 함께 일을 다녔다. 물론 사춘기 때는 대문 밖으로 나와 있는 하수구 정비작업을 돕다가 친구들을 만나면 창피해 얼른 몸을 숨기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시원하게 뚫어놓은 배수구는 어린 그에게 이상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가 하는 일에 좀 더 이론적인 것이 보태지면 어떨까, 자연스럽게 공대로 진학하게 되었고 그는 토목학을 전공하고 군대까지 다녀온 청년이 되었다.

그가 하는 일은 단순한 막노동이 아니라 예술처럼 느껴졌다. 방바닥의 보일러 관이 놓일 위치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라든가, 깨어놓은 방바닥에 시멘트로 미장을 한다든가, 목욕탕의 타일을 붙이는 일들을 그는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을 완성하듯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성을 다했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그는 이제 아버지의 조수가 아닌 어엿한 설비업체의 직원이 되어 있었다. 사장과 사원이 단 두 사람밖에 없는 작은 업체이지만 인건비를 줄여 설비나 보수를 맡기는 사람들에게 싸고 질 좋은 공사를 해주는 알찬 회사의 직원이 된 셈이다.

많은 청년들이 말쑥한 화이트칼라를 원할 때 그는 기꺼이 주머니 많은 조끼를 선택했다. 그의 주머니에는 자질구레한 연장들과 더불어 그에게 전수해 줄 수많은 경험으로 축적된 그의 아버지만의 비법이,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한 칸씩 차곡차곡 들어가 있을 것이다. 조끼 주머니 속 신념과 연장들이 더없이 믿음직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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