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 마을신문 기자들의 '세상 엿보기'
신현애 시민기자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독립 운동이란, 사전적 의미로 어떤 국가 또는 세력이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 자치권 등의 권한을 되돌려 받거나, 스스로의 자립을 위해 벌이는 모든 행위라고 한다.

독립운동가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신채호, 김구, 안중근, 유관순 등이다.

주변 열강들은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우리나라는 1910년 일본에게 강제 합병 됐다. 이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내는 물론이고 만주 지역까지 활약했다. 민족 지도자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만주와 간도, 연해주 등지를 떠돌며 옮겨 다녔다. 이때 독립운동가 중에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인물 정순만이 있었다.

정순만

정순만(1873-1911)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했고, 이승만, 박용만과 함께 '3만'으로 불리며 독립운동 당시부터 크게 활약한 인물이지만 고향에서 조차 그의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정순만은 청주시 옥산면 덕촌리(하동정씨 집성촌)에서 부친 정석종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일본 자객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 일어나자 충북 ,경북, 강원도 등을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정순만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각도 청년회대표를 소집한다. 을사오적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을 암살하기 위해 평안도 장사 수십명을 모았으나 일제의 감시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봉수(내수), 정춘수와 정미의병에도 참여했고, 이상설 등과 헤이그 특사를 배웅 한 후,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1908년 2월경 '해조신문'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 했고, 이 신문을 통해 항일 논조와 민족의식을 고취 했다. 이후 '대동공보'의 주필을 맡았고, 주요 인사들과 안중근 의거를 계획하는데 참여한다.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

쓰러져 가는 조국을 세워 보려고 죽음도 불사했던 독립 운동가들. 이를 기록해 기념 하고자 2019년 12월 정순만의 고향 덕촌리에 '독립운동가 마을'이 들어섰다. 또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공모에 선정돼 청주시 1호 마을 아카이브(기록 보관소) 사업으로 조성 되기도 했다.

선생의 활동사외 일제 강점기에서 민족정신을 일깨웠던 덕신학교가 있다. 덕신학교는 정씨 문중 어른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설립 됐는데, 설립 110년 만인 2016년 그들의 일념을 담아 복원 됐다. 이곳은 청주의 독립운동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독립 운동가들은 가족이나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자들이 있는데 정순만은 아들 정양필과 며느리 이화숙 등이 가족이다.

정부에서는 1986년 애국지사 정순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1995년에는 아들 정양필(1893-1974)과 며느리 이화숙(1893-1978)에게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우리 옥산지역에 이런 훌륭한 민족운동가가가 있었다는 것은 큰자랑이다.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픈 역사이지만, 또한 꼭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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