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노마드(Nomad). 물과 풀을 찾아 드넓은 대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소나 양 등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을 뜻한다. 이들의 집을 게르(Ger)라 하는데, 분해와 조립이 간편하다. 물과 풀이 부족하면 가축을 몰고 곧바로 물과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이런 노마드가 유목 시대가 아닌 첨단 시대에 나타났다.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다. '21세기형 신인류'라고도 한다, 디지털 노마드는 프랑스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가 1997년 '21세기 사전'에서 처음 소개한 용어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장소에 상관하지 않고 여기저기 이동하며 업무를 보는 사람을 일컫는다. 여기서 의미가 더 확대됐다. 정보와 지식, 오락 등 정신적 먹거리를 찾아 시공간을 초월해 세상과 소통하면서 변화가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말이다.

디지털 노마드의 대표적 무기는 스마트폰(Smartphone)이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인터넷에 접속해 시공간의 제약 없이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사냥할 뿐만 아니라 실시간 의사소통도 가능하다. 인터넷 접속은 무한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고 창출한다. 시쳇말로 못할 것이 없다. 이제 스마트폰은 사물이 아닌 신체 일부다. 자나 깨나 몸에 붙어 사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하루를 보낼 수 없고 사유와 행동이 어려울 정도다. 몸의 기본이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아닌 하나의 장기, 스마트폰을 보태 '육(六)장육부'라 해야 옳지 않을까?

디지털 노마드는 얽히고설킨 채 이리저리 뻗어 양분을 흡수하는 땅속 잔뿌리들과 같다. 한 그루에서 끊임없이 가지가 퍼질 뿐만 아니라 한 가지에서 여러 개의 다른 가지가 뻗어 나와 땅에 닿으면 뿌리가 되어 그 뿌리에서 다시 가지가 자라는 반얀(Banyan)나무와도 같다.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네트워크 가운데 가장 복잡한 것으로 알려진 뇌 신경망과도 같다. 모두 접속의 방향이 사방팔방으로 치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다.

디지털 노마드 탄생을 이미 19세기 말에 예고한 사람이 있다. 예술 이론가인 러시아 태생의 칸딘스키(1866~1944)다. 그는 "19세기가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시대였다면 20세기는 '와(and)'의 시대가 될 것"이라 했다. 당시 디지털이란 말조차 없었을 텐데,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의미 있는 언표이다. '와'는 '나'와 '나 이외 모든 것'과의 접속이다. 사회관계와 사유 지평의 확장을 의미한다. 접속은 사방으로 열린 창조와 생성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순간과 조건마다 '나'와 '집단'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탈주선(脫走線) 긋기인 셈이다.

유목민 노마드가 척박한 대지에 대해 적응성과 기동성이 강하듯 디지털 노마드 역시 디지털 기기 접속에 대해 적응력과 기동성이 뛰어나다. 노마드가 '물, 풀의 유무'의 경계를 넘나든다면, 디지털 노마드는 '정보,지식의 유무'의 경계를 넘나든다. 노마드가 물풀 수색이고 디지털 노마드는 지식정보 채굴인 셈이다. 디지털 노마드는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점이 노마드와 다름이다. 노마드가 현실 공간에 대한 도전이지만, 디지털 노마드는 사이버 공간에 대한 도전이다. 하지만 모두 벽을 허물고 더 넓은 지평과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도전임은 분명하다. 안에서 밖으로의 탈출이다. '밖'은 경험하지 못한 미래의 세계다.

디지털 노마드는 자유로운 접속을 일삼기 때문에 특정 가치관이나 삶 방식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노마드 개체를 이끌 지도자나 이데올로기 없이 여기저기 접속하며 창조적 삶을 추구한다는 얘기다. 이들은 폐쇄성과 배타성 대신 개방성과 공유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이들은 그릇된 판단과 사유를 유도하는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난다. 특히 디지털 노마드는 집단지성(集團知性)을 형성한다. 중앙집중적 통제나 모델 없이 탈중심적인 네트워크(사방팔방 접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중의 자유로운 상호작용과 수평적 협력을 통해 창출하는 집단지식과 기술을 말한다. 이 집단지성은 작은 물고기들의 거대한 무리와 같다. 이 무리는 큰 물고기 형상을 만들어 천적에게 포획되지 않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논설위원

그렇다면 디지털 노마드의 집단지성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포획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적 몸부림이 아닐까? 아쉽지만 우리 디지털 노마드는 '헤쳐 모여, 사분오열, 맹목적 당파'의 정치적 악습으로 분자(分子)적 수준의 지성 형성에 그치고 있다. 분자적 지성은 사막의 모래알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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