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 마을신문 기자들의 '세상 엿보기'
김승진 시민기자 (남제천 마을신문 봉화재사람들)

제천 모녀재길
제천 모녀재길

길에는 인생이 있고 삶의 애환이 서려 있다. 길을 따라 사람이 오가고 물자가 이동한다. 길에 서린 숫한 사연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낳으며 후대로 전승된다.

제천시 덕산면 도기리와 단양군 단성면 벌천리를 잇는 모녀재도 이 지역주민의 애환이 깃든 길이다.

지금은 주변에 사방으로 큰 길이 나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곳 모녀재는 단양 단성면과 경북 예천과 문경에서 충주와 덕산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야말로 사람들로 북적거린 재였다.

"옛날에는 예천의 소 장수들이 소를 몰고 충주를 가야 하는데, 가려면 꼭 모녀재를 지났어. 이 길은 단양에서 충주로 가는 길 중 돌지 않고 질러가는 길이었거든. 털이 난 소떼가 다녀 그런가, 털 난 여자가 살아 그런가, 이 길을 모녀재라고 했지."

제천 모녀재길
제천 모녀재길

제천 덕산면 도기리에서 태어나 80년 이상을 살아오신 윤영식 어르신의 전언이다.

조선 영조 1757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도 그런 비슷한 기록이 실려 있다.

'이 고개에는 아주 신비로운 여자가 사는데, 온 몸에 털이 북실북실하고 옷도 입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였다고 한다. 그 여자는 산등성이를 타고 와서 산을 넘어 사라지곤 했다.'(毛女峴在東八十里 帶美山來諺傳神女不食不衣 滿身生毛甚超崗越巒云)

마을어르신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 동네사람들이 경상도 문경 쪽 사람들하고 결혼한 사람이 많았어. 척박한 경상도 땅에서 거적 몇 장 짊어지고 넘어와서 큰 부자가 된 사람도 많지. 여기 이 땅은 노력만 하면 뿌린 대로 거두는 땅이거든. 그러니 맨손으로 와서 돈을 버는 거야."

어르신의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전통적인 농지의 계량단위로 가늠된다. 다른 지역이 200평이나 300평을 한 마지기로 계산하는데 반해, 이 곳 땅은 150평을 한 마지기로 계산하는데, 이는 곧 다른 지역의 300평에서 농사짓는 양과 이곳의 땅 150평에서 나는 소출량이 같을 정도로 땅이 좋다는 뜻이다.

윤 어르신은 "비옥한 땅 덕분에 이곳 주민들은 약초뿐만 아니라 뭐든지 심었다"며 "그렇게하면 다른 곳과 비할 바 없이 품질이 좋다 보니 경상도에서 고개 넘어 와서 콩이고 팥이고 사러 와서 커다란 봇짐에 짊어지고 가는 일이 허다했다"고 기억한다.

모녀재 고갯마루에는 느티나무 성황목이 서 있다. 1970년대까지 제천시 덕산면 도기리와 단양군 벌천리 모녀티 주민들이 각각 정초에 성황목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6·25 전쟁 때 인민군이 이 고갯길을 넘어갔다고 하며, 현재도 국군의 행군 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길은 이렇게 사람들을 섞이게 해준다. 그 과정에서 인연도 맺어지고, 독특한 발음과 억양이 만들어지며, 최종적으로는 개성 있는 감성과 기질, 그리고 문화가 생성된다. 그런 점에서 모녀재길은 충북 북부지역, 좁게는 제천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소 구별되는 문화적 양태를 띠는 데 일조했다 할 것이다.

세상살이의 이치가 늘 그러하듯이 길에도 부침이 있는 걸까. 인근의 죽령이나 이화령고개는 고속도로가 생겨 그 길을 따라 인구유입이 많은데 비해, 이곳 모녀재는 오히려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옛길이 되어, 예전에 누리던 영화만을 기억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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