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충북수필문학회장

여름 한낮 햇살이 따갑다. 초록 물결을 타고 붉은 연꽃이 함초롬히 오수를 즐기고 있다. 와 보고 싶던 곳이다. 옥골의 연꽃 방죽, 이름에서부터 곱고 정겨움이 묻어난다.

옥골은 미호천이 흐르고 있는 평야 지대다. 기름진 땅에 물 걱정 안 하고 농사지어 옥 같은 쌀을 수확하였다하여 동네 이름을 옥골이라 부르다 191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옥동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다.

동행한 옥골 여인은 후드득후드득 연잎을 몇 장 따내더니 꽃도 두세 송이 꺾어 내민다. 금방 꺾은 줄기에서 하얀 진액이 명주 실오리처럼 따라 나와 손에 감긴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커다란 잎 하나를 머리에 척 얹는다. 어릴 적 허구한 날 이러고 놀았다며 함빡 개구진 웃음을 짓는다. 그녀의 놀이터였던 게다. 연을 대하는 모습이 옛 동무를 만난 듯 스스럼이 없다. 굳이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온 마을이 한 가족처럼 지내던 시절 이야기가 실오라기를 타고 포실포실 풀려 나온다.

연잎이 무성해지기 시작하면 그녀는 고무함지박을 타고 살금살금 방죽을 누비며 연근을 뽑아 올리거나, 연밥을 따곤 했단다. 연밥서리다. 여남은 살 꼬맹이가 겁도 없이 한 길을 웃도는 방죽을 누볐다. 쌀방개처럼 연잎 사이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니며 먹을거리를 챙겼다는 이야기가 한 편의 동화로 펼쳐진다.

50년은 족히 넘은 이야기를 어제 일 인양 선명하게 그려낸다.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나는 모양이다. 꼬질꼬질 땟국물이 흘렀을 그 아이의 눈빛은 연잎에 또르르 구르는 이슬처럼 빛났을 터이다. 그 당시 참외서리, 수박서리는 흔한 일이었지만, 연밥서리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신선하다. 덩달아 괜히 나도 신이 나면서도 아찔한 느낌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었나. 쪼끄만 게 어찌 그런 발칙한 생각을 했는지 머리가 내둘러진다.

연잎이 무성하면 그 줄기들이 얽히고설켜 물에 빠져 못 나올 일은 절대 없단다. 고무함지박을 앞세우고 방죽을 헤엄치며 다니다 발끝으로 연근을 감지하면 물속으로 쏙 들어가 뽑아 올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그녀의 치열한 삶의 자세는 어쩌면 유년 시절 고무함지박을 타고 방죽을 누비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는지 모른다. 어린 애가 왜 겁나지 않았겠는가. 위험해도 조금만 움직이면 연근이며, 연밥, 우렁이, 잉어, 가물치를 줄줄이 낚아 올릴 수 있다는 걸 일찍부터 안 게다.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작은 체구에 바지런하고 똘방지다. 눈빛이 형형하다.

김윤희 수필가·충북수필문학회장
김윤희 수필가·충북수필문학회장

동네 앞에 자리한 방죽은 그저 연꽃으로만 유명한 줄 알았더니 그곳은 동네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던가 보다. 그 안에 품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에서 먹을 것을 취하며 어려움을 이겨냈던 거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에게 연꽃방죽은 한 가족 피붙이처럼 살가운 건지도 모른다. 그녀가 수십 년 전에 행하던 일, 아무렇지 않게 연잎을 따고 연꽃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반가움의 표시다. 옛 동무와의 포옹이다. 추억과 함께 연꽃 향기로 그윽해지고 있는 옥골에서 잊혀져 가는 정서를 읽는다. 정겨운 사람의 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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