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나란히 줄서 있는 난을 바라본다. 잎 가장자리에 노랑 띠를 두른 천금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가꾸고 있다. 곧고 바른 기품은 선비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남을 만하다. 서툰 솜씨지만 먹을 정성들여 갈아서 붓을 들고 난을 치고 있다, 마음대로 붓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쳐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 나이 20대 때이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연세 많으신 미술 선생님은 한지에 두어 개의 발그레하고 먹음직스러운 복숭아를 나무 가지에 그리고 초록빛 잎 세를 점찍듯 그리셨다. 그리고는 연월일과 이름을 쓴 다음 낙관을 찍으면 작품은 완성되었다. 난 황홀감에 취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선생님 손은 요술 손 이었다. 그림을 액자에 넣어 교실이나 방에 걸어 놓고 바라보면 행복한 마음이 스멀스멀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아교를 따듯하게 녹여 놓고 온갖 씨앗들을 그릇그릇 담아서 마치 죵묘 상을 방불케 했던 선생님도 있었다. 나무 판에 아교를 바르고 색색의 씨앗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의 제목은 선생님만 안다고 했다. '추상화' 아주까리(피마자)씨는 특이했다. 마치 참나무에 풍댕이가 앉아 있는 듯 보였다. 한 쪽 옆에는 작은 벌레 닮은 채송화 씨를 붙이는 날도 있고 밤색의 봉숭화 씨도 선생님 그림에 물감구실을 톡톡히 했다. 노랑색의 좁쌀, 흰색의 각시동부, 파란 완두콩 알록달록한 강낭콩 등 오방색의 곡식들이 다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되었다.

하나의 작품이 연출되는 추상화를 바라보며 미래는 어떤 세계가 펼쳐질 것인가를 상상의 나래를 펴는 미술 선생님 방은 참으로 어수선했다. 그분의 눈에는 온갖 것들이 모두 그림 재료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가 된다.

멋도 부릴 줄 모르던 선생님이 어느 날 코밑에 상처가 났는데 빨간 머큐롬을 바르고 나타났다. 우리 미술반 아이들이 킥킥거리고 선생님 눈을 피해 웃었던 아련한 추억이 고개를 든다. 선생님은 독신녀로 오직 그림 그리는 취미로 사신다고들 했다. 그 선생님도 파파 할머니가 되어서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계실 것만 같다.

미술 작가님이 계셨다. 그분은 말을 못하는 분이었다. 그는 국전에 작품을 내시는 이름난 분이다. 음성 감곡 매괴 성당의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대작을 그리기 위해 그림 속에 빠져 세월을 엮었다.

작가님의 초대로 우리들은 작업실을 갔다. 크리스마스와 새해가 가까운 때였는지 카드가 무척 많이 그려져 있었다. 카드엔 꿩의 깃털, 나비의 날개도 붙어있고 은박을 찍어 반짝거렸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물감이나 먹물 말고도 온갖 것들이 다 동원 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 된다는 것을 배웠다.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그림을 그리는 데는 많은 재료비가 필요 했다. 한 때 나도 열정적으로 그림 그렸던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재료를 사주기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고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요즈음 손녀딸 장난감을 정리하다보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책과 신기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 시대를 잘 타고난 요즈음 젊은이들이나 아기들은 어떤 꿈을 키우고 있을까,

하루하루 보내는 시간이 왜 이리도 짧기만 한 것일까. 마치 각 당의 대선을 앞에 둔 후보들처럼 목표를 향하여 뛰고 있는 모습처럼 시간이 황금처럼 느껴진다.

키워드

#아침뜨락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