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 마을신문 기자들의 '세상 엿보기'
신현애 시민기자 (옥산소식지)

옥산. 두해 전, 이곳으로 이사 와서 집 가까이에 고려 구국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묘소가 있다는 이야기는 지인으로부터 이미 들은 터였다. 정확한 위치는 몰랐지만 마음속으로는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이 나라 안보의 의표로 살게 하신 명장군이 영면하고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한 자긍심이 느껴졌다.

옥산면 국사리,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눈에 보일 듯한 거리이다. 한국 전쟁사의 3대첩인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고구려 영양왕23년(612)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고려 현종10년(1019)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조선 선조25년(1592)이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전쟁이 없지만 그 중에서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 없었더라면 북방의 강동6주 (평북 해안지방:흥화, 용주, 통주, 철주, 귀주, 곽주)는 지금 중국의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를 만큼 큰 전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2년 전,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묘소가 우리 고장 옥산에 있음은 주민들에게는 무한 자부심을 주며 후세들에게는 민족적 긍지를 고취시키는 중요한 역사교육의 현장이기도 하다. 장군의 선조는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에 일조한 삼한벽산공신 강궁진. 강궁진이 고려 개국당시에 경주지역에서 금천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강감찬을 낳았다.

장군이 태어 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혹은 음양가에서 길흉을 점칠 때 쓰는 9성)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이름이 낙성대(落星垈)이다. 이외에도 장군의 탄생 설화는 몇 개 더 있다. 강감찬 장군의 시호는 인헌으로 초명은 강은천이었다. 신장 155cm의 장군은 48년(정종3년) 12월 22일에 출생했고, 1031년(덕종1년) 9월 9일(82년 8개월 18일)에 사망했다. 왜소한 체구의 장군은 젊은 시절 이름을 강감찬으로 개명했고 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로 기록돼 있다. 생전 받은 작위는 남작에서 진작된 후작이다. 분봉된 봉지(封地)는 천수현(天水縣). 아마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후작일 듯 하다.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지휘해 남침하자 고려는 서북면 행영을 조성, 강감찬을 행영의 도통사로 삼는다. 이어 20만 대군을 소환해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해 지금의 군단장과 같은 직위를 맡긴다.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웠고 구국제민(救國濟民)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백성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옷이 해져도 계속 입고 다녔다고 한다.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이르는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였다.
 

고려사에는 그에 대해 키가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사람들이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 할 때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 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문관 출신이며 탁월한 전략가인 작은 거인 강감찬을 생전의 무관 '군인 대통령' 박정희는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던가 보다. 1974년 낙성대 공원 안에 있는 장군의 동상과 사당인 안국사를 제법 큰 규모로 대대적인 정비를 했다. 1988년부터는 강감찬 장군의 호국정신과 위업을 기리는 추모제향으로 낙성대 인헌제가 매년 10월에 열린다. 이제 곧 10월이 온다. 옥산면 국사리, 오늘 이 나라를 있게 한 위대한 영웅 강감찬 장군의 묘소를 다시 찾아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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