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필자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간섭받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주변과 관계 맺기를 좋아하지 않고 사색과 산책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주변에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 흔한 모임들과도 거리가 멀다. 그런 점에서 혹자들은 개인주의는 관계간의 단절을 가져오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개인주의적 지향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특히 사회적 압력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적 행위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는 상황에 따라 반바지 차림을 허용하는 회사나 관공서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속내는 반바지를 편하게 입고 싶지만 분위기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덥지만 참으면서 일을 한다. 더욱 보수적인 학교의 상황은 어떨까 교장은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교사들이 왜 복장을 단정히 하지 않느냐는 훈계까지 한다. 교사가 그런 복장을 하면 학생들을 지도해야 할 학교 분위기를 망치게 된다고 말한다. 코로나19 상황을 거치면서 서구사회와 달리 주변의 눈치가 무서워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최고 권력자들이 모인 청와대의 모습은 어떨까. 그곳은 더 심하다. 보여주기 식의 차림을 제외하곤 그 더운 한여름에도 긴팔 셔츠를 입는다. 복장뿐이겠는가. 앞서 지적한 대로 개인이든 직장이든 주변의 보이지 않는 압력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압력이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억압한 결과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사회는 집단적 '아비투스(habitus)'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회란 점이다. 아비투스란 "집합적인 개인의 행위, 지향, 성향, 동기체계 내의 실천 등을 지칭하는 의미로 의식적, 무의식적 실천행위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우리사회에서 사회적 압력에 항거하거나 거부하면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남세스럽지만 필자가 미국 대학에 연구원으로 머물던 시절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오는 교수들이 있었다. 심지어 팔과 다리에 문신을 한 교수들도 있었다. 우리사회에서는 교수가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오고 문신까지 하고 다닐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피어싱이나 문신은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문신이나 피어싱을 해보고 싶어도 하질 못한다. 한때 필자도 작은 문신을 해보고 싶었지만 주변의 만류와 시선이 두려워 포기하고 말았다. 개인의 용기부족이라고 말하기 전에 생각해 봐야할 부분이 많다는 의미다. 문신이나 피어싱은 자신을 표현하는 미적 수단에 불과할 뿐인데도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우리사회에 보이지 않은 압력이 크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문신이나 피어싱은 화장을 하는 것이나, 눈썹을 그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이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귀걸이는 하는데 피어싱을 왜 이상하게 보는 걸까. 눈썹 문신은 괜찮고 팔다리 문신은 왜 편견을 갖는가.

개인주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이념이다. 자신 만의 사적 범위를 침해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개인주의의 사회의 특징이다. 오지랖이 넓은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하는 '똘레랑스(tolerance)' 문화가 자리 잡기는 어렵다.

[중부시론]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개인주의와 똘레랑스는 동전의 양면이다. 개인들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똘레랑스 문화가 성숙되어야 하고 똘레상스가 문화가 성숙되기 위해서는 개개인들이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이들 양자가 서로 맞물려 똘레랑스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사회처럼 오지랖이 넓은 사회는 아직도 똘레랑스 사회로 가야할 길과는 멀다는 또 다른 의미다. 한 개인은 개인 그 자체로 자유로이 존재할 수 있을 때 가장 나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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