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구중회 공주대학교 명예교수·백제기악문화원장

금년도 어김없이 겨울(冬)이 이르러(至) 도착했다. 이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몇 가지 얽힌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원래 동지(태음력)와 크리스마스(태양력)은 같은 날이다. 일종의 작은 설(亞歲)였던 것이다. 또한 동지는 달력을 나누어주는 날이기도 하다. 동짓날 그날 날씨의 징후(物候)에 따라 일년 동안을 미리 알아보는 풍속도 있었다.

하여튼 금년도 겨울이 어김없이 도착하여 손을 흔들고 있다.

▶동지=크리스마스

원래, 동양의 '동지'와 서양의 '크리스마스'는 같은 날이다.

'동지'의 구조는 '동'+'지'이 결합된 단어이다. 자전에서 '冬'을 '겨울 동'으로 읽는 것처럼 훈이 '겨울'이고 음이 '동'이다. 마찬가지로 '至'를 '이를 지'로 읽는 것도 훈이 '이르다'이고 음이 '지'이다. 그러므로 '겨울이 이른 날'이 동지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겨울'이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역법 상에서 '겨울이 이른다'는 것은 태양(太陽)을 기준으로 할 때, 출발점이 이른 날이라는 뜻이다. 365일의 첫걸음인 것이다.

중국 주나라에서 동지가 들어 있는 11월을 정월로 삼고 설로 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당나라 선명력(宣明曆)이 '11월 갑자 초하루 한 밤중 동지'(甲子朔 夜半 冬至)로 사용한 것은 이러한 근거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선명력은 고려 충렬왕 원년에 원나라 수시력(授時曆)이 채택될 때까지 사용되었으므로, 1308년까지 동지가 설이었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최남선은 동지의 축제(冬至祭)가 곧 크리스마스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다만 최남선의 이러한 논리를 이해하려면, 하나의 단계를 짚어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의 축제일이기 때문이다. 초창기 그레고리 역법을 만들어 이를 널리 전파하고자 하였으나, 동편의 진영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동방교회에서는 12월25일 태양제(太陽祭)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의 태양제를 수용하되 기독교를 받아드리기로 빅딜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의 탄생과는 관계가 없는 축제일로 새로운 도약을 이루어낸 셈이다.

▶작은 설(亞歲).

11월에는 동날이 들어 있어 동짓달이 한다. 동지에는 팥죽을 끓여 광, 장독 등 집안에 뿌리던 풍속이 있고 민간에서는 이 동지 팥죽을 먹어야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으로 쳤다고 한다.

동지는 '작은 설'이라 부를 만큼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 풍속의 유래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曹操의 셋째 아들인 曹植의 '동지헌말이송(동지가 되어 버선을 드리는 노래)'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작은 설'에는 상서로운 날로 버선을 주는 경사라는 것이다.

또한 동지가 돌아오는 날 밤을 '동제(冬除)' 혹은 '2동제(二除夜)' 심지어는 '제야(除夜)'라고 기록도 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더라도 새로운 옷을 준비하고 음식을 마련하며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하나의 명절로 지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12월 그믐날을 제석(除夕) 혹은 제야(除夜)라고 한다. 동지설과 구정설의 혼용에서 온 풍속이라 생각된다.

▶동지와 팥죽

동지에는 어느 가정에서나 팥죽을 쑤어 먹는다. 팥을 삶아 으깨거나 체에 걸러서 그 물에다 찹쌀로 단자를 새알만큼씩 빚어서 넣는데 이것을 새알심이라고 한다. 철 음식으로 사당에 차례하고 또 국물을 대문간 또는 대문 판자에다 뿌리니 이렇게 하면 액을 막는다고 한다.

팥은 곡물 중에서 유독 붉어서 붉다는 것은 밝다는 것에서 온 말이며 악귀를 예방하거나 쫓을 때는 주술로써 팥죽을 먹거나 대문에 뿌렸던 것이다. 한 여름 삼복더위에 병이 나기 쉬우므로 병이 나기 쉬우므로 이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팥죽을 쑤어 먹기도 하였다.

중국 양나라 '형초세시기'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가 재주 없는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역질 귀신이 되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하였으므로 동짓날 팥죽을 쑤어 물리쳤다고 하여 이러한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즉 묵을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데 악귀를 쫓는 행사를 하는 새해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역서(曆書) 배부

옛날에는 동지가 되면 관상감에서 다음 해의 역서를 만들어 왕실에 바쳤다. 이 역서는 노란 색으로 장정한 黃裝曆이 가장 고급이고 그 다음이 靑裝曆이고 그 다음이 白裝曆이었다. 임금은 이 역서에 '同文之寶'라는 御璽를 찍어 문무배관과 각 관아에 나누어 주었다.

각 관아에서도 동지가 되기 전에 미리 종이를 준비하여 관상감에 인쇄를 부탁하여 직급에 따라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이 역서는 다시 고향의 친지나 이웃들에게 나누어 쓰게 하였다.

구중회 공주대학교 명예교수·백제기악문화원장
구중회 공주대학교 명예교수·백제기악문화원장

특이 이조의 서리들은 고신(告身, 벼슬아치의 임명서))을 써준 사람이 벼슬하게 되면, 당참전(當參錢, 수령을 하거나 또는 다른 고을로 옮길 적에 단골 서리에게 주는 돈)을 그 답례로 동지에 청장력을 증정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당시에 역서 배부와 속설로 '하선동력(夏扇冬曆)' 즉 여름에는 부채 겨울에는 역서가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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