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힐링 테라피스트'(healing therapist).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 사무실을 열면서 마케팅 목적(이라고 쓰고 장삿속으로 읽는다)으로 내걸은 캐치프레이즈였다. 신체적 불균형을 치료하는 전문가인 테라피스트(therapist)처럼 소송을 겪으면서 피곤해진 마음까지 힐링해 주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변호사가 되겠다는 의도를 담기에 적절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힐링 테라피스트'라는 멋진 말이 공염불로 끝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변호사로서 의뢰받은 재판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이웃으로서 소소한 자문까지 기꺼이 응했다. "변호사가 이렇게 까지 신경 써줘?"라는 반문이 나올 정도의 섬세한 일처리는 우리 로펌의 자랑이었다. 마음의 치유를 위한 非법적 노력에는 많은 심적 부담이 따랐다. 직접 경제적 풍요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대신 사람을 얻었다. 그 덕에 변호사로서 나름 성공적으로 고향에 안착하였다. 그 관성으로 아직까지 고향에서 오지랖 넓은 '힐링 테라피스트' 변호사로 살아오고 있다.

그러던 2021년 연말 어느 날 갑자기 왼쪽 귀가 먹먹해졌다. 귀가 먹먹하니 현기증이 느껴졌다. 의뢰인의 말을 잘 듣기도 어려워지고, 상담의 집중도도 떨어졌다. 증상 발병 첫째 날은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일을 마치고 저녁 일정을 취소한 후 귀가하여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푹 쉬면 나을 것으로 생각했던 귀는 이튿날이 되어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변에 증상을 호소하니 앞으로 영영 청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돌발성 난청이나 메니에르병이 의심되니 꼭 병원을 가보라는 진지한 반응이 많았다. 의뢰인의 하소연을 듣는 것이 주업인 '힐링 테라피스트'에게 청력 이상이 웬 말인가? 잔뜩 위축되어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은 증상의 원인에 관한 여러 가능성을 유스타키오관이니, 달팽이관이니, 전정기관이니, 특정한 신체기관을 콕 집어서 설명해주셨다.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더 묻지도 않았다. 그 기관들이 문제를 일으킨 근본 원인을 대략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은 처음에는 가장 흔한 원인으로 짐작되는 포인트를 치료해 보자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3일가량 복용하고 차도가 없으면 청력검사나 정밀진단을 한 후 다른 처방을 해 보자고 한다. 그래도 차도가 없으면 청력을 잃을 수 있으니 큰 병원에 가야한다고 겁을 준다. 진료실을 나오는 어깨너머로 의사 선생님이 판사의 선고처럼 단호하게 말한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당분간 푹 쉬어야 합니다."

다행히 처음 처방받은 약을 먹는 것만으로도 증상은 완화되었다. 하지만 나았다 싶으면 이내 다시 먹먹해 지기를 지금까지 한 달 가량 반복하고 있다. 약으로는 한계가 있고, 연말연시 법원 조직개편을 앞두고 속속 재판기일이 지정되기 때문에 변호사 업무를 줄이는 것도 애초에 불가능했다. 특히 '힐링 테라피스트'라는 '부캐'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의뢰인의 인생고민을 나누며 감당해야 하는 감정과 체력 소모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병원을 다니며 최근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는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의뢰인으로부터 큰돈을 받으니 증상이 깔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공감했다. 내 경험에 비추어도 돈은 스트레스 해소와 적절한 휴식의 전제조건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수임계약상 의뢰인으로 시작했지만 함께 일하며 정서적 교류를 나누는 인간관계가 되어 일을 마칠 즈음에 다시 계산서를 내미는 것에서 조차 민망함을 느낀다. 그런 '힐링 테라피스트'에게 그 변호사의 경험에 따른 자본주의적 해결책은 무용지물이었다.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권택인 변호사

업무, 스트레스, 치유와 돈이라는 한 싸이클을 마치고 다시 업무로 돌아와 스트레스, 치유, 보수를 청구하는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 하는 것이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변호사의 숙명인가라는 고민을 잠깐 해본다. 그러고 보니 변호사의 일상은 끝없이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포스(Sisyphus)의 괴로운 삶과 어딘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귀는 먹먹하고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에 대한 테라피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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