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잿빛 하늘이 낮게 내려앉고 있다. 눈이 내리려나 보다. 새해를 맞은 지 20일을 지나고 있는데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다. 어쩌면 1월은 봄을 위한 쉼일는지 모른다. 거실에서 이불 한 자락을 도로로 휘감고 겨울눈의 모습으로 웅크린 채 게으름을 떨어본다.

하릴없이 TV 리모컨을 움켜 들고 화면을 응시한다. 정치권에선 여전히 빤한 말싸움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라는 패널들은 물 만난 고기 마냥 뻐끔거린다. 침방울이 화면 밖으로 튀겨 나올 듯하여 채널을 돌린다.

'아, 옛날이여' 유치원생 꼬맹이가 천연덕스럽게 목청을 높인다. 고사리 같은 주먹을 불끈 쥐고 까딱까딱 발장단을 맞추며 다시 볼 수 없는 그 날을 소환하고 있다. 분명 노랫말의 의미를 아는 게다. 깜찍하기 이를 데 없다.

2년 남짓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 난국에 웃음을 준 것이 노래다. 방송사 여기저기 비슷한 프로그램이 난무하는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혼신을 다하는 출연자들의 열정은 감동이다. 불과 3-4분짜리 노래, 그 한 곡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래를 찾아 연습을 했겠는가. 성대가 파열될 정도로 부르고 또 부르며 자신을 갈고 닦은 모습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난 언제 한 번 저렇듯 치열하게 스스로를 담금질한 적이 있었던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아직 못 읽은 채 쌓여 있는 책들을 들춰본다. 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가루전쟁'이란 책을 펴들었다. 설탕, 소금, 밀가루, 후추, 커피와 초콜릿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일상에 흔해 빠진 이 가루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파되어 영향을 미쳤는지 흥미롭게 전개된다.

습관처럼 찻잔에 믹스커피 한 봉을 털어 넣고 휘휘 저으며 수십 년 아무 생각없이 매일 마셔온 커피를 생각해 본다. 검은 마약이다. 아프리카 동부의 에티오피아를 원산지로 꼽는다. 그곳 고원지대에서 염소를 돌보던 목동에 의해 빨간 열매, 커피콩의 비밀이 발견된다. 사랑하는 염소들이 밤새 지치지 않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예사로 보지 않은 예리한 목동의 눈썰미 덕분이다. 기분 좋게 피로를 녹여낸다. 잠을 쫓는데도 그만인 효능이 급속도로 번져갔다. 한때 일부 종교집단에 의해 악마의 길잡이로 매도되기도 했지만, 18세기 이르러 유럽을 중심으로 이미 문화로 자리 잡는다. 미국의 커피문화는 19세기 공장 근로자들에 의해서이다.

우리나라는 고종황제가 1896년 러시아로 피신해 있던 무렵 커피를 접하면서부터라고 전해온다. 그로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부유층의 상징이었다. 대중화가 된 것은 1950년 한국전쟁과 더불어 미국의 인스턴트커피로부터 비롯되어 다방 커피가 일반화되면서부터이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살기가 어렵다고 모두 아우성이다. 그래도 여전히 커피점 숫자는 늘어나고, 점심시간 사무실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손에는 커피잔에 들려 있다. 그 모습을 보면 '정말 경제가 어려운 거 맞나' 싶지만 나 역시 책상에 앉으려면 커피부터 챙긴다. 분명 마약이다. 잿빛 하늘, 나태해지는 기분에 반짝 햇살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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