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단발머리 여인의 형상이다. 목은 사슴처럼 기다랗고, 입술은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얼굴의 크기에 비해 큰 네모형의 두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우수에 젖은 두 눈이 마치 등불 꺼진 창문처럼 다가오는 순간이다. '창문'이라고 발음하니 학창시절도 떠오른다. 창문 밖의 세상을 동경하던 모습과 여러 생각이 스친다. 내 앞에는 어둠이 서린 창문처럼 두 눈을 상징화한 우은정 화가의 그림이 놓여 있다.

'여인'의 얼굴이 전시된 갤러리를 찾는다. 정작 화가는 자리에 없다. 덕분에 갤러리 주인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여인의 네모난 '두 눈이 창문 같아서' 좋다는 말에 내 생각을 들킨 듯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 갤러리 주인은 일상이 몸을 구속하여, 그림 속 창문으로 여행과 일탈을 꿈꾼단다. 여인의 두 눈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녀이다. 나도 비슷한 생각에 머물던 시절이 있었다.

직장이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여겨지던 시절이다. 특별한 꿈도 이상도 아닌 가슴속에 불끈불끈 일어나는 욕망을 제어하느라 힘겹던 이십 대 시절이다. 그렇다고 일상을 박차고 나올 용기도 없으며 실체 없는 고민을 늘어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그런 삶의 과정도 성장하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잡다한 고민을 백지에 글로 적어 마음을 달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궁금하다. 그나마 일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감상을 적어 세상 빛을 보게 하여 실체 없는 고민을 조금은 푼 듯하다.

예전에도 지금도 질문은 이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등속에 삶의 근원적 물음이다. 돌아보니 작가라는 업은 나를 질문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말한다. 정녕 답은 없는 것일까? 나를 관장하는 마음의 신에게 묻고 있다. 박범신 소설가는 등단 소감에 "문학, 목매달아도 죽어도 좋을 나무"라고 적었다. 이 문장을 마주하고 질문은 추가된다. 정녕 "종교인이 순교하듯 문학을 위하여 순문殉文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다시 여인의 창문 앞이다. 문장가는 인간의 눈을 '마음의 창', '마음의 등불', '마음의 호수', '마음의 거울' 등으로 비유한 글이 상당하다. 그만큼 두 눈은 소중하다는 것이다. 최근에 마음을 울린 성영희의「창문이 발끈,」이란 시에선 "집의 주인은 그러니까 창문의 불빛"이고 "불빛 없는 창문은 사람이 꺼진 것이다"라고 읊는다. 나는 이 시구의 '창문'이 인간의 '눈'으로 읽힌다. 눈〔창문〕으로 비치는 불빛이 샛별처럼 영롱하려면, '마음의 창'부터 맑아야만 할 것 같다. 그 창을 통하여 보여줄 빛이 생명의 불빛이고, 빛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창을 갖는다는 것은 언제든지/ 나를 잠그거나 열 수 있는 은밀한/ 고리 하나를 가졌다는 것이다" 시인의 시어처럼 창문을 가진 이는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성역의 은밀한 고리를 가진 주인이다. 오늘도 마음의 창으로 보여줄 불빛이 투명하도록 감정의 현을 조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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