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몇 년 전에 중국 연수를 간 적이 있다. 주로 학교에 많이 들렀는데, 수업하는 장면을 직접 보게 되었다. 북경에 있는 어느 중등학교였다. 수학 공책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노트 필기가 한자로 빽빽했다. 저 어린 학생들이 그 어려운 한자로 일일이 썼다는 말인가. 물론 간체자이지만 보기에도 숨이 막혔다. 획수도 많은데다 띄어쓰기도 없다. 그뿐이 아니었다. 교실에 있는 컴퓨터를 보니, 자판에 한자는 없고 모두 영어다. 우리처럼 자모음이 아니라, 영문자 조합으로 한자를 만들어 낸단다.

나는 그때 한글의 위대성을 절감했다. 만일 중국이 한글을 쓴다면 저렇게 학생들이 힘들어하지 않을 테고, 문맹률도 대폭 줄어들겠지 하고 뇌까렸다. 그런데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생각은 수그러들었다. 그들의 대단한 자존심을 보았기 때문이다. 빌딩이나 상가 등 어느 간판을 보아도 간체자를 위에 큼지막하게 쓰고, 아래에 조그맣게 영어를 썼다. 한자만 쓰고 영어를 쓰지 않은 곳도 많다. 난 이를 보고 그들의 중화주의를 뼛속 깊이 느꼈다. 움츠러들기도 했다. 우리는 그 위대한 한글을 만들어 놓고도 오랫동안 쓰지 않았고, 오히려 비하하며 한자를 고집하고, 지금은 간판마저 영어로 다 바꿀 태세가 아닌가.

아직도 한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이유가 뭘까. 나도 한때는 그랬다. 한자를 모르면 주눅이 들고, 대학 교재가 한자로 되어 있으니 죽어라 한자 공부를 했다. 제사 때 쓰는 축문은 내 차지였다. 한자 좀 안다고 아버지가 내게 맡겼다. 오죽하면, 한자로 축문을 써야 조상께서 알아듣는 줄 알았다. 훈민정음은 1443년에 탄생하였지만, 한글의 역사는 짧다. 1948년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지만 실패했고, 2005년에야 국어기본법이 공포되었다. 국어기본법이 시행되었어도 여전히 신문이나 교재는 한자투성이였다. 겨우 17년 정도 흐른 지금, 한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니 천지개벽이 아닐 수 없다.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한자를 상류 문화로 보는 인식이 있다. 여기에는 뿌리 깊은 사대주의가 꽈리를 틀고 있다. 한자를 쓰면 좀 무게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한글은 쉽고 가벼운 글자라는 비하 의식도 있다. 또 한자는 바뀌지 않는데, 한글은 변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지역 명소를'핫플레이스'라고 한다. 뜻은 같은데 한글 표기가 달라졌다. 한자로 쓰면'地域 名所'그대로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자라나는 세대가 읽을 줄을 모른다. 교과서가 모두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한글 교과서가 문제가 있다면 바꿔야 하고, 한자가 편하면 지금도 한자를 써야 한다. 한글로 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글은 소리글자지만, 쓰고 읽는 순간 뜻이 생긴다. 아직도 한자 제호로 된 신문이나 문학잡지가 있다. 제호는 그 발행물의 얼굴이다. 좀 부끄럽지 아니한가.

한글은 암만 봐도 세기적 발명품이다. 한글은 우리에게 소통이요, 민주주의요, 인권이다. 멀지 않아 세계인은 영어보다 한글을 쓸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나는 이를 굳게 믿고 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