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림산이 감싼 작은 마을 '같은 듯 다른' 삶의 모습

동림사 위에서 내려다본 금성마을. 

 

들어가는말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농촌 작은 마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고향을 지키며 묵묵히 흙을 일궈온 사람, 도시에 살다 귀촌하거나 귀향한 사람, 주말에만 왔다 갔다 하면서 전원생활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

농사철에만 거주하다 겨울에는 도시로 돌아가는 사람, 또 유유자적하면서 본인 수양에 힘쓰는 자유인도 있다. 모양새는 다르지만 한 마을에서 각자의 인생을 채워가고 있다.

이렇듯 마을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에는 각각의 인생철학과 마을 역사가 담겨있다.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을 엮어보고자 한다.

작고 아담한 금성마을에도 봄이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동림산 숲처럼 조용히 분주하다. 경운기 소리가 딸딸딸 나는가 싶다가 금세 고요해진다. 새 소리 바람 소리가 허공을 채운다. 마을을 지키고 있는 크고 작은 나무들은 시새우듯 연둣빛 잎사귀들을 피우고 있다.

옥산면 주산인 동림산(東林山)이 마을 뒤를 감싸고 있고 열두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작은 절 동림사와 마을 안길, 동림산 등산로 입구가 동시에 보인다. 동림산은 해발 457m로 옥산면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과 경계를 같이 한다.

곽노열씨 담배건조실

안길로 접어들면 마을 중앙에 옛 담배건조실이 남아 있는 곽노열(71) 씨 집이 보인다. 오래된 건물 기둥 아래엔 커다란 주춧돌이 눈에 띄고 사랑방 쪽엔 옛날 아궁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 뒷마당엔 예쁜 장독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곽노열씨 아궁이 

"우리 할아버지가 나 태어나기 직전에 지었다고 들었어. 집 지을 때 삼촌이 동림산에 있는 낙엽송을 베어 오느라 고생 많이 했다는데 6·25 때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했대."

"아버지는 인물이 잘 나서 마을 처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들었어. 서울에서 직장생활도 하시고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도 받았어. 7남매 중에 내가 고향을 지키고 있지."

고령 박씨 박선묘비
고령 박씨 박선묘비

이 마을 유래를 아느냐며 손글씨로 쓴 메모지를 보여줬다. 메모지에는 '금성마을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마을로 군사요충지로서 창터, 성터, 가마터, 말터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500여 호에 이르는 대단위 성촌을 이루었고, 그 뒤에는 금성창리로 불리기도 했다. 1640년대 청렴의 상징인 박선(朴銑·박문수 어사 조부) 선생이 기거하던 곳으로 추측되는 기와집터와 그의 묘가 동림산 자락에 남아 있다.'고 써 있다.

많이 알려진 암행어사 박문수의 조부 묘가 있다고 하니 호기심이 들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고령(高靈) 박씨 후손인 준수(49) 씨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묘지 입구에 큰 비석이 있는데 약 100년 전쯤 공주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당시 교통수단이 어려워 비석을 옮겨오는데 300여 명이 동원되었다는 것, 마을에 있는 가마솥을 전부 내다 음식을 해서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준수(오른쪽)씨와 어머니

준수 씨는 객지에 살다가 10여 년 전에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80)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 뜰팡에서 쪽파를 다듬고 있는 어머니는 스물두 살에 시집왔단다.

"처음에는 종답도 없고 살림이 어려워 밥제사만 지내다 점점 형편이 나아져서 떡도 올리면서 조상을 모셨어."

"코로나 때문에 마을회관에도 못 가고 이웃 어른들이 하나둘 요양원으로 가니 자꾸 마을이 허전해지고 있어. 그나마 아들이 함께 있어서 든든햐." 어머니의 말소리에 쓸쓸함과 강인함이 엿보인다.

몇 걸음 더 걸어서 길모퉁이 집에 사는 곽노필(72) 씨를 만났다. 태어날 때부터 이 집에서 계속 살고 있다고 한다.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짓고 있다.

곽노필씨 부부 

"옛날에는 소 팔러 조치원, 병천, 청주까지 걸어 다녔지. 엄청 고생스럽긴 했어도 오다가다 막걸리도 먹고 지금 생각하니 재미있었어."

"75년도에 집사람이 스물두 살에 시집왔는데 엄청 고생했지. 시부모와 시할머니, 시동생들 여섯이 있는 집으로 온 거거든. 담배 농사지으랴, 살림하랴, 아이들 키우랴, 쩔쩔맸지. 게다가 딸 셋을 내리 낳아서 어른들 눈치 보느라 더 힘들었어. 그래도 나중에 아들 낳고, 향교에서 주는 효부상도 타고, 딸들 덕분에 좋은 데도 다니고 그랴."

정작 집사람은 쑥스러워하는데 노필 씨의 아내 칭찬은 계속된다. 안방을 살짝 들여다보니 아직도 부모님과 조부모님 사진이 걸려 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효심이 전해진다.

마을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서 신복록(88) 할머니를 만났다. 인사를 하자마자 옛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시집올 땐 전기도 없을 때라서 엄청 고생했어. 원래 이 동네 들어오는 길이 저쪽 음지에 있었는데 내가 반장 볼 때 길이 넓어지고, 시내버스도 들어오고, 양지로 새길이 생겼어. 지금 이렇게 마을을 내려다보면 정말 기분이 좋아. 아이구, 이런 이야기 들으러 오니 정말 감사하네." 혼자 지내는 복록 씨는 가뭄에 물 만난 물고기처럼 기운이 솟아올라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작은 마을엔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필요하다. 어떻게 살아오셨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몇십 년 전 일들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리고 얼굴엔 분홍빛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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