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향토사학자

문무를 겸했던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은 인종 1년인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다.

장군은 어릴 때부터 무인의 자질을 보였지만 31세 때인 1576년(선조 9년) 2월에야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사복시 주부(종6품), 조산보 만호, 녹둔도 둔전관 겸임, 감사 이광의 군관, 진도군수를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됐다.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왜군의 침략에 대비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 적진포해전. 사천해전, 제1차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안골포해전 등에 참여해 승리함으로써 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선조는 1593년 9월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그 후 이순신 장군은 제2차 당항포해전, 장문포해전에서 이겨 큰 전공을 세웠으나 원균(1540~1597)의 모함으로 한양으로 끌려가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권율(1537~1599)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했다. 그런데 원균이 1597년 8월에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1561~1597), 충청수사 최호(1536~1597)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이순신 장군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해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 진도 울돌목 명랑해전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기적의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다.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죽자 일본 해군은 철수를 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12월 16일 명나라 제독 진린(1543~1607)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선조 31년인 1598년 11월 19일 전사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해 역사상 유례가 없는 23전 23승의 놀랄만한 전과를 올려 한국에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등과 함께 불세출의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제독 도고헤이하치로(1848~1934)도 이순신 장군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1758~1805)제독은 군신(軍神)이 될 수 없다. 해군 역사에서 군신(軍神)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나는 일개 부사관도 못 된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살신성인해 조국을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한국사는 물론 세계 해전사에 찬란하게 길이 빛나고 있다.

우리 후손들이 이순신 장군 탄신 477주년을 맞아 본받아야 할 것으로는 충효와 애민 정신, 뛰어난 리더쉽과 전략전술, 타고난 문장력과 창의력, 불굴의 투지와 인내력 등을 들 수 있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시인·향토사학자

2011년 4월 28일에 현충사 내에 충무공 이순신기념관이 개관돼 그의 혼이 담긴 주요 유물 40여점이 전시돼 있다.

이순신 장군의 진중일기인'난중일기(亂中日記)'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해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인 4월 28일을 전후해 아산에서는 성웅 이순신축제를 개최하고 있고, 서울 중구에서는 충무공 탄신 기념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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