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

가끔 혼자 길을 나선다. 증평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밥, 이팝이 지천이다. 풍성한 눈꽃이다. 초록 잎새 위에 소복이 쌓인 하얀 쌀꽃, 눈이 시리다. 애달픈 전설을 이고 서 있어도 그저 아름답다. 배부르고 등 따신 덕분일 게다. 보릿고개의 전설이 아득하다. 눈에 보이는 5월은 온통 하얗다. 깨끗하고 순수하다. 향기롭다. 길가에 피어 있는 이팝꽃이 그러하고 송아리송아리 아까시 꽃이 향기를 흩날린다. 산자락이 달큼하다.

증평군 도안면 산정길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수난의 시절, 가족, 피붙이를 나라에 바친 한 집안의 내력 앞에 섰다. '연병호 항일역사공원'이다. 자그마한 공원이 아늑하다. '연병호 항일기념관'을 비롯하여, 상징조형물, 연병환 공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두루마기와 흰고무신이 조각된 기념석과 고통스런 독립운동 장면이 스토리를 담아 조각되어 있는 기념석 예닐곱이 눈길을 끈다. 아기자기한 조형물을 보며 바닥에 그려진 국내외 독립운동의 발자취, 그 역사의 흔적을 따라 유유히 거닐다 보면 생각이 깊어진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섰다. 곡산 연씨가 도안에 세거하게 된 유래가 소개되어 있다. 연병호 한 사람만을 위한 기념관은 아니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데는 그의 형 연병환이 있다. 가문의 기둥 역할을 한 사람이다. 3대에 걸친 5명의 독립유공자 가계도가 한 가문의 이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연병환은 동생 병호뿐만 아니라 딸 연미당, 사위 엄항섭, 외손녀 엄기선에 이르기까지 3대를 거쳐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한 장본인이다. 그는 관립외국어 학교를 다니고 궁내부 주사를 거처 인천, 부산 등 해관에서 근무하다 1907년 중국으로 이주했다. 용정세관에 근무하며 비밀리 독립운동을 지원한 북간도 한인사회의 주도적 인물이다. 그의 행적이 뒤늦게 밝혀져 2014년에 비로소 유해를 봉환하여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였다.

딸 연미당은 남편 엄항섭과 함께 한국 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했고, 재건 한국애국부인회, 자유한인대회를 주도했다. 특히 김구를 모시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도시락 폭탄 사건시 도시락 보자기를 만든 사람이다.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 10인으로 꼽혀 충북여성미래프라자에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엄항섭은 김구 주석을 측근에서 보필하며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사람으로 1950년 전쟁 때 납북되었고, 1962년 사망하여 평양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연미당, 엄항섭 사이에서 태어난 딸 엄기선은 자연히 독립운동이 일상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리라.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연병호는 형인 연병환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 국내에서 활약한 관계로 그 업적은 형보다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항일역사공원이며 생가의 명칭이 연병호로만 되어 있는 것은 못내 아쉽다. 한 가문의 대물림으로 조명되는 것이 의미가 더 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핏줄이란, 가문이란 무엇인가. 같은 조상의 피를 이어받아 겨레붙이가 되는 관계가 핏줄이다.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들어있다. 우리는 가문에 대물림할 무엇이 있는가. 꽃잎 하얀 5월에 무엇을 그려 넣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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