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국민이 없다
국가에 국민이 없다
  • 박재광 기자
  • 승인 2022.05.22 1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검찰공화국이라니! 오래전 신조어지만, 최근만큼 자주 등장한 적이 없다. 국어사전에 오르지 않았지만, 그 용도와 사용횟수를 고려하면 조만간 등재될 가능성이 크다. 검찰공화국은 검사 등 검찰 출신 다수가 국정에 참여하는 나라로 보면 맞다.

여기서 검찰공화국은 윤석열 정부를 가리킨다. 검찰공화국 지적은 지난해 국민의힘이 대선 선대위를 대거 검사 출신으로 구성하면서부터 시작했다. 당시 민주당은 "윤석열 후보가 검사 전성시대를 열고 있다. 10명이 넘는 검찰 출신 인사들이 선대위 요직을 독차지한다. 선대위 구성은 그 자체로 윤 후보의 지향을 드러낸다. 윤 후보가 만들 정권이 검사 출신들로 구성된 검찰공화국이 될 것이라는 예고편을 보여주고 있다."며 비난했다. 민주당 역시 '운동권공화국'을 세워 다수 운동권 출신이 국정을 좌지우지했으면서 말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듯싶어 비난은 평가절하다.

여하튼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윤 정부는 검사 출신을 대거 기용했다. 민주당은 법무부가 '윤석열 사단' 인사를 검찰 요직에 배치하자 "검찰공화국의 부활"이며 "검찰 장악을 위한 전광석화 같은 속도전"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대통령실 비서관급 6명 중 5명이 검찰 출신이다. 측근 검사들로 꾸린 '호위무사대'라 지적해도 현 정부는 할 말이 없다. 더욱이 전 정권 때 승승장구했던 검찰 간부들을 모두 한직으로 내몰아 검찰공화국의 위력을 보였다.

문재인 정부는 편 가르기, 갈라치기, 내로남불, 몸집 불리기 등에 기량이 뛰어난 선수였다. 오히려 동굴의 우상에 벗어나지 못해 제 발등 찍는 우를 범했다. 국민은 분노했다. 국민의힘 역시 역겨워하며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 결과가 윤 정부 탄생이다.

기원전 중국 사상가 장자(莊子)가 살아있다면 이런 윤 정부를 보고 뭐라 했을까? <莊子:외편 12편 천지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답은 3가지 상실이다.

첫째, 부동동지지위대(不同同之之謂大)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보는 것을 일러 '大'라 한다. 동등하지 않은 것을 차별하지 않고 포섭하는 것이 훌륭함이다. 도(道)의 각도에서 보면 추한 여인이나 아름다운 서시(西施:월나라·중국 4대 미인)는 모두 하나여서 차별할 수 없다고 함이 장자의 얘기다. 하지만 윤 정부는 측근 챙기기를 통한 갈라치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역시 문 정부와 다름없다. 포용력(包容力) 부재다. 이는 정치보복을 잉태한다.

둘째, 행불애이지위관(行不崖異之謂寬)이다. 행동을 표나게 다르게 하지 않는 것을 '寬'이라 한다. '애이'는 보통 사람들과 아주 다르게 행동함을 뜻한다. 행동을 세속과 달리하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이 극진한 것이다. 하지만 윤 정부는 관용력(寬容力)을 상실했다. 도량과 용서가 요구되는 시대정신을 읽지 못했다. 이 역시 보복의 다름 아니다.

셋째, 유만부동지위부(有萬不同之謂富)다. 다른 만 가지를 갖춘 것을 '富'라 한다. 다른 만 가지를 모두 갖추면 가지지 않는 것이 없다. '부'는 물질, 국민의 지지. 신뢰, 경쟁력 등에 바탕을 둔 통치력이다. 윤 정부는 절반만 갖춰 온전한 통치력을 소유하지 못한 셈이다. 시작부터 검찰공화국이란 비난에서 앞으로 국민으로부터 '부'를 얻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장자의 주장에 견주자면 윤 정부는 차이 나지 않는 반복으로 탈영토화에 실패했다. 탈영토화의 실패는 생성과 변화의 원천인 차이를 동일성 안에 가두는 바람에 창조적 변화에 성공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윤 정부는 그저 상투적이고 익숙한 문 정부 등 이전 정부의 세상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통치의 편리함과 내 식구 챙기기에 몰두해 저 멀리서 지켜보는 국민을 도외시했다. 기존 체제나 구조 등 설정된 경계 너머 미지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려는 몸부림이 크게 부족했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논설위원

지금까지 권력 포획자들은 창조적 변화의 몸부림을 망각했거나 무시했다. 차이 나지 않는 반복만 일삼았다. 권력을 위임한 국민은 속이 터질 지경이다. 국가에 통치자 등 그의 패거리는 있어도 국민은 없다.

바람직한 통치는 통치자가 탈영토화 선을 긋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된다. 통치자는 기존 통치에서 탈피하고 바깥에서 통치력 생산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통치자는 언제나 다른 것이고, 다른 것에서 태어나야 한다. 정상[통치자]은 정상(頂上)에 올라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