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 김현식 제천제일고 수석교사

요즘 우리 사회에 '사랑'만큼 아슬아슬한 용어가 또 있을까?

누구는 사랑 때문에 살았다 하고, 또 누구는 사랑 때문에 죽었다고도 한다. 영롱한 무지개의 모습으로 오는가 하면, 絶命(절명)을 부르는 비정한 독약으로도 오는 것. 드물게는 수단과 도구가 되기도 하여 상대의 짐작 범위 내에 있되 천의 얼굴로 점령군처럼 당도하는 희한한 속성의 이 '사랑'은 늘 捕虜(포로)의 생명 연장선 위에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랑' 오 남발 되는 참으로 징한 오월을 맞으며 교사로서, 자녀로서, 부모로서, 동료로서의 내 사랑의 행태를 돌아보게 된다.

불쑥 짧은 순간 얼굴만을 내밀고 떠나는 막내딸의 차가 마을 어귀를 빠져나가고도 한참 후에야 돌아섰을 九旬(구순) 노구의 부모님께는 일만분의 일도 갚지 못한 不渡(부도)의 사랑이었고, 내 관심과 눈빛에 무수한 희망을 걸고 내렸을 푸른 제자들에겐 몹시 인색한 사랑이었고, 태어나면서부터 낯가림이란 걸 모르고 자랐던 내 자식들에겐 사막의 신기루 같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매사 느릿한 성격의 후배 교사에게 어떤 때는 '신중하다' 격려하고, 어떤 땐 '게으르다'며 다그치는 변덕스런 사랑이었다.

김현식 제천제일고 수석교사
김현식 제천제일고 수석교사

생각하면, 내 '사랑'은 뭐 하나 갖춘 게 없었고, 언제나 함량 미달이었고, 더욱이 받은 사랑에조차 보답하지 않은 상습적 체납자이다. 한마디로 나는 '사랑'에 생초짜며 문외한이며 최소한의 의무와 신의를 지키지 못한 배신의 아이콘이다. 하여 세상 선한 눈빛의 그대가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오늘은 황동규 시인의 표현을 빌려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라 답하겠다. 같은 질문을 내일도 받게 된다면,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기적이라' 답하겠다. 만일 같은 질문을 또 받게 된다면. 사실은 '사랑이 무엇인지' 나도 알고 싶다고 답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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