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20대 시인이 세 명의 수강생 앞에서 강의를 한다. 컴퓨터와 그 주변기기를 활용해 화면을 띄우고 하는 품이 꽤 차분하다. 그것들을 능숙히 다루는 솜씨가 부럽다. 내 살아온 날들이 기계들과 익숙지 않거니와 개인적 특성도 있어 친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다 보니 내게는 그들이 어설프다.

얼마 전에는 갑자기 프린터에 문제가 생겼다. 일부만 흐릿하게 나오다 얼마 못가 아예 백지만 뱉어냈다. 맏이가 도와주어 어려움을 넘겼다. 전문가에게 수리를 부탁해야지 하고는 식사자리에서 지나는 말로 프린터가 안 돼 아침부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더니 사위가 슬며시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간다. 잉크를 분사하는 부분이 막혀 청소했더니 잘 된단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컴퓨터과학과 학생인데 너무 심하다. 매 학기 신청 학점은 많은데 이수 학점이 적어 엉터리 학생이 되어간다.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택한 것이지만 자주 고민이다. 결론은 내 앞에 놓인 사하라 사막, 컴퓨터를 피해갈 수 없으니 느리더라도 통과하자는 것이다. 지난 학기도 다섯 과목을 신청해 두 과목만 이수했다.

다른 이들이 잘못하는 것을 얘기하면 그 분야는 유전자가 아예 없는 것이니 잘하는 것들에 집중하라고 조언하지만, 못하면 불편한 것들이 있다. 내겐 그게 컴퓨터다. 웬만한 일들은 할 수 있고, 더러 남들을 도울 수도 있다고 믿었는데 이제 자주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모처럼 판매상품이 많은 가게에 들러 물건을 고르고 계산대로 향했더니 기계와 계산하란다. 이런 곳에서 융통성 없는 기계와 맞설 줄이야. 가격표는 잘 찍히지 않고 매번 직원에게 달려가니 아예 다가와 전체를 다 처리해준다.

서류처리를 위해 관공서를 찾았다. 창구직원은 작성할 서류를 앞에 두고 유리벽 너머에서 마스크를 쓴 채 빠르게 설명하고는 작업대에 가서 작성해 오란다. 들을 때는 알 것 같았는데 돌아서니 아니다. 몇 개 잘못 기입하면 다시 작성해야 할 것 같아 분명한 것만 적어 어정쩡하게 다시 창구로 갔다. 직원은 답답했는지 아예 도장을 달라고 해서 필요한 곳에 자신이 꾹꾹 찍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뜻은 어렵지 않지만 행하기는 무척 힘들다. 자신의 분야는 자주 접해 익숙해지고 불편을 모르니 그렇지 못한 이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어려운 용어와 방식들로 가득 찬 것을 대하는, 게다가 연세든 분들은 얼마나 무력감을 느낄까?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힘들어해 대신 알을 깨 주었더니 그 과정을 통해 갖춰야할 기능을 얻지 못해 죽고 말았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었다. 앞에 놓인 사막을 건너며 얻어야 할 기능이 있다면 내 자신 온 몸으로라도 걸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일 수밖에….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지난하게만 느껴지는 이 사막을 어떻게든 건너면 시원한 샘물과 맛있는 과일, 쭉 벋은 포장도로가 한동안 이어지겠지 하는 기대를 한다. 이런 사막이 내 생애에 몇 개나 더 놓여있고 그 중에 얼마나 건널 수 있을까? 눈앞의 사막에 집중하고 발 앞에 길만 보고 한 걸음씩 걸어가고 싶다.

어쩌면 나는 사막을 다 건너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할지 모른다. 사막은 연달아 나타날 테니까. 그래도 걷다보면 때로는 빛나는 별도 보고 시원한 바람을 쐬고 운 좋으면 어린 왕자도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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