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에티오피아의 콘소 마을에 성인의 허리 둘레 정도의 둥근 바위덩어리가 공공 장소에 놓여 있다. 그 마을의 아이들이 적당한 나이가 되면 그 바위덩어리를 들어 머리 위까지 올려야 한다. 합격하면 결혼할 자격이 생기고 못하면 자격이 없다 성인식이다. 고대 사회에 제법 있었고 인디언 사회에도 있었던 성인식이 현대엔 사라지고 교육으로 대체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성인식에도 물론 빛과 그림자가 있다. 가령 허약한 아이는 결혼할 자격이 없을 수도 있다. 성인식이 고대의 어느 사회들엔 절실했을 것이며 완벽할 순 없을 것이다. 현대의 교육에도 물론 빛과 그림자가 있겠지만 칠년 전에 콘소 마을에 가서 뜻밖에 둥근 바위덩어리를 바라보며 느껴졌던 것들이 가슴에 스멀거린다. 그 바위덩어리엔 콘소의 어른들이 대대로 심어온 지혜, 아우라, 마을의 절실, 아이들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여긴 마음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한두마디로 표현 불가능한 묵직한 경건, 감각, 통째로 전달되고 이어받는 감동, 채찍과도 같은 결기가 응결되어 있다. 아버지가 들었기에 자식으로서의 자아도 존재한다. 그 먹먹한 느낌 속에 자신도 들 수 있다는 다짐, 저걸 들기 위해 또래들과 무수히 연습도 하고 그 과정에 이야기와 추억, 마을의 설화도 생겨났을 것이다. 조부, 증조부, 고조부...아득한 선조부터 이어진 피(血)의 강물도 만날 것이다. 현대의 교육에 결여된 아프고 성스러운 것들이다.

수메르의 점토판엔 학교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놀랍게도 학교의 선생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집에서도 아버지, 학교에서도 아버지인 것이다. 아득한 고대 국가에 학교의 원형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19년에 독일의 인지학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가 세운 발도로프는 지금도 훌륭한 대안교육이라고 평가받는다. 그곳의 교사는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시간에 빵이나 음식을 손수 만든다. 부모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만이 발도로프의 교사 자격이 주어진다. 수메르 문화에서 소박하나마 학교가 학교다운 모습을 보였듯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본질에선 다름 없는 교육이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참교육의 이 기나긴 강물에 비교하지 않더라도 현대의 교육은 학생들의 인성이나 인격 향상 등이 아니라 사회의 생산 양식에 필요한 인력을 양산하는 성격이 있음은 부정되지 않는다. 교육제도, 교육 프로그램, 교육에 대한 기본 의식이 그 방향으로 짜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실태 속에서 아이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우정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느낄 겨를이 없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실종되고 진정한 배움과도 멀다. 그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고뇌와 성찰, 제도적 뒷받침 없이 학생들이 소비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콘소 마을의 아이들은 무거운 바위덩어리를 들어올리는 전 과정 속에서 무언의 배움을 가슴 깊이 얻을 것이다. 인디언의 아이들은 마을 추장의 지휘를 따라 하루종일 옥수수밭에서 옥수수 하나를 따도록 한다. 그게 성인식의 전부이다. 아이들은 옥수수밭에서 이것을 골랐다가 마음을 접고 다른 옥수수로 이동한다. 그 앞에서 또 고민하고 갈등한다. 석양이 비칠 때쯤 옥수수 하나를 품고 옥수수밭을 빠져나올 때면 가슴 속에 말로는 표현 못할 깨우침과 아득한 곳에서부터 내려오는 지혜에 흠뻑 젖을 것이다. 현대의 교육은 고대의 성인식에 있던 삶의 통짜배기 감각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현대 교육을 대대적으로 수술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사회를 위해 소비되는 동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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