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테크노 단지 조성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 들었다. 벌거숭이가 되어 문화재 탐사팀이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 표를 해둔 푸른색의 갑바들과 노란 깃발을 꽃아둔 곳이 보인다. 길을 지나며 물음표를 찍는다.

조선조 선조 때 오행민(吳行敏) 행간(行簡)행건(行建)삼형제가 마을 입구에 위치한 중반산 바위에서 늘 글공부를 하여 대과에 급제 하였다. 그 후 그림바위는 유명해졌으며 마을 호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무당 바위, 부처 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문암 입구 중반 산엔 소나무가 운치를 더하여 선비들이 들놀이를 즐기던 곳이다. 무당과 선비가 바위 위에서 춤을 추다가 아래 연못에 빠져 죽었다하여 무당 바위라고도 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보면 정한 수 떠놓고 촛불 켜고 두 손 모은 여인이 기도하는 풍경을 본바 있다.

왜정시대 때 문암 마을에 선비가 모여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심술이 난 왜놈들이 마을 산 중허리를 잘라 맥을 끝으니 선비들은 밖으로 나돌고 근동 마을 정북토성안의 부녀자들이 바람이나 가출하였다 한다. 문암 뒷산 골짜기에 큰부처가 있었는데 이 부처를 산중허리 자른 곳에 가로 묻으니 재앙이 사라지고 평화로위 졌다하여 부처골로 불렀다 한다.

요즈음 그곳에 초등학교가 세워 진다고 하는데 중반산 잘룩하게 잘린 그곳에 정말 부처가 가로 묻혀 있는지 마을 사람들의 관심거리다.

그 외에도 청주시내 학교에서 봄가을이면 소풍을 왔던 산이다. 문암 앞 무심천 뚝이 용과 같이 생겼으며 그곳에서 용이 승천을 하였다하여 용절 뚝, 솔밑들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문암마을 앞산을 안산이라 불렀으며 그 안산에 외부에서 피 묻은 시신을 마을 안을 통과 장례를 치르고부터 쌍 초상이 나기 시작 했다. 지금 거주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이 피부로 느낀 실화이다. 이상하게 목발 짚은 불구자도 두 집이고 지적 장애를 가진 집도 두 집이며 뇌경색으로 쓰러지는 일도 일주일 간격을 두고 두 집이 생겨났으며 초상이 나면 꼭 쌍 초상이 나곤 했다. 그런데 테크노 단지 조성으로 그 묘가 이장을 하고나니 쌍 초상이 멈추웠다. 마을 경로당에 노인들이 모이면 참 신기한 일이라며 화제 거리다.

1979년 필자는 이 마을에 들어왔다. 문암 마을은 기러기 터라며 객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부자가 된다 하며 재산이 모아지면 이 마을을 뜨라고 소개꾼은 말했다.. 풍수지리란 무시 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문암동은 시의 서북부에 있다. 동(東)은 사천동, 서(西)는 원평동, 남(南)은 엘지로가 나있으며 북(北)은 정상동이 접해 있다.

대대적인 테크노 단지 조성으로 아파트가 세워지고 신도시가 창출되어 인구가 일만오천으로 불어나는 강서2동은 석양의 노을이 겁나게 멋지다. 서산에 걸려 있는 성난 해를 자랑하고 싶다.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송절동에는 백로 서식지가 있다. 우미린 우방 아파트에 입주민들이 처음 이사를 와서 소나무 위에 서식하고 있는 백로 떼들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참으로 신비스러우며 아름답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문암동과 송절동에 늪지대가 많고 무심천에 먹거리가 풍부하여 이곳에 둥지를 틀고 서식하고 있는 백로 식구들이다. 멀리서 보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 하리 만큼 아름답다. 그 배설물과 먹거리를 물고와 새끼를 양육하는 송절동 산 주변은 악취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가까이 사는 주민들은 울상이다.

며칠 전 그곳을 지나다 보니 기자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는 것을 보았다. 백로들의 수난기인 듯싶다. 백로의 전설이 먼 훗날 생겨나지 않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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