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지난밤사이 내린 비는 집 앞에 있는 요란한 도랑물 소리를 몰고 와 새벽잠을 깨웠다. 말라가던 도랑이 모처럼 생기를 찾은 소리였다. 올해 우리 지역의 장마기간은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라고 기상청은 예보하였다. 특히 요즘 비는 야행성 장마로 낮에는 소강상태를 보였다가 밤에 국지성 호우를 내린다고 하는 보도는 잠들기 전 집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게 했다.

빗방울이 소리에 묻혀 퉁겨져 올라오는 모습을 멍 때리고 바라보는 내게 남편은 비도 오고 하니 부침개 재료를 준비해 달라고 한다. 준비만 해 주면 전 부치는 것은 물론이요 막걸리 또한 자신이 사 오겠다는 제안을 하는 것을 보니 날궂이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뒤란에 있는 텃밭으로 향했고 남편은 막걸리를 사러 나섰다.

어린 시절. 가끔 나는 양은 주전자를 손에 들고 제법 멀리 떨어진 삼거리에 있는 구멍가게로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라 빈 주전자를 들고 갈 때는 겅중겅중 뛰어갔지만 돌아올 때는 찰랑거리는 주전자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막걸리로 가득 채워진 주전자를 연신 양손으로 바꿔가며 조심해서 걸어도 흔들림이 조절되지 않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울컥 막걸리를 토해내던 주전자가 나를 당황케 했다.

그럴 때면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맞추고 목젖 깊숙이 막걸리를 부어 마셨다. 발끝까지 짜릿하게 전달되는 느낌은 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하였지만 오가는 길에 난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최고였다. 목이 마를 때 마시는 막걸리 한잔의 시원한 맛을 일찍이 알아버린 것이다.

요즘은 어린아이에게 술 심부름 시키면 큰일 날일이었지만 그때는 모두 그렇게 했다.

아무튼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술 심부름을 즐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작로를 따라 곧장 집으로 향했던 길을 좁은 논둑길과 들길을 지나 밭둑에 까맣게 열린 오디를 따 먹는 쏠쏠한 재미도 발견하고 혼자만의 공상으로 노닥거리는 시간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지름길이었던 그곳에는 오디만이 아니라 뱀딸기도 유난히 많았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붉은색의 뱀딸기가 눈길을 끌었지만 애써 외면하였다. 뱀땰기는 뱀이 먹는 딸기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뱀젖이라고 불렀던 식물도 있었는데 그것 근처에는 정말 뱀이 많을 것 같아서 무섭기까지 했다. 그곳을 지날 때면 긴장해서인지 걸음이 빨라졌고, 안전하다 싶은 곳까지 왔을 때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뱀젖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던 나이였다. 어른이 되고서야 뱀젖의 이름이 쇠뜨기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길에는 독사가 살고 있다더라. 마을 어른들이 여러 번 보았다는데... 독사는 사람이 지나가도 안 도망가고 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혀"

어머니께 그 말씀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집 아저씨가 독사에 물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순덕 수필가
김순덕 수필가

소문과 함께 나의 술 심부름도 끝이 났다. 부엌 한편에 묻혀있던 물 항아리가 술 항아리로 바뀐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한 되씩 받아다 먹던 막걸리를 어머니께서는 한말을 주문해서 사다 부었다. 아마도 내심 어린 딸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도 살짝살짝 막걸리를 훔쳐 마시곤 했는데 가끔 내 머리가 멍청하다고 느껴질 때면 일찍이 술을 마셔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시원하게 울려 퍼지는 '막걸리 한잔'의 노래가 TV에서 흘러나온다. 얇게 부쳐진 부침개위로 거센 빗소리도 내려앉는다. 오늘 점심은 부침개와 막걸리로 한 끼를 퉁친 제대로 된 날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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