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앎의 시작이라 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면 영원히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만큼은 자신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 말하는데, 아무도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죽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죽기 직전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이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플라톤 저, 천병희 역,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 숲, 2012)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 스스로의 눈을 믿지 못하고 대중들이 보는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그는 죽는 것이 좋은지 사는 것이 좋은지는 신만이 안다고 함으로써 실제 보고 경험한 것만을 앎의 범주에 넣었다. 즉, 편견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그는 흔들림 없이 의연하게 우리에게 지혜를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는 지혜를.

모든 앎의 시작은 이런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며,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도 이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남의 눈으로 보지 말고 너의 눈으로 보아라. 있는 그대로 보고 느껴라. 그것이 너 자신을 아는 길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있거나, 우물 안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편견도 많고, 고집도 세고, 그리하여 할 말도 많다. 우리가 배운 지식이 우리를 우물 안에 가두기도 하고, 우리가 경험한 것이 전부인 것처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편견 없이 본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만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를 아는 것이고, 앎의 출발이고, 발전 가능성을 넓히는 길이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스스로의 말처럼 소크라테스가 남들보다 현명했던 것이다.

우리는 왜 한 곳만을 바라보고, 우리들의 가치는 왜 한 가지로 제한되어버렸는가. 우리는 왜 한 길만을 고집하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는가.

우물 밖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지만, 우리에게 우물 안에서 보이는 별은 하나밖에 없다.

다음은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관한 얘기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에게 도에 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자 지음, 김학주 옮김, '장자', 연암서가, 2010)

알지 못하는 것보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더 어리석은 것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때 비로소 앎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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