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김상수 신부 / 청주시노인종합복지관장


보좌신부 시절 친구의 권유로 정신지체인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 모임이 정신지체인과 그 가족이 교회와 사회의 품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서 탄생된 ‘믿음과 빛’공동체라는 것은 그 후에 알게 되었다. 이 인연으로 사회복지를 공부하게 되어 지금의 자리에 있다.

몇 년 전 ‘마라톤’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한동안 밝게 했다. 오래 되었지만 ‘제8요일’도 같은 맥락의 영화다. 두 영화가 똑같이 정신지체인을 통하여 주변사람들이 빛을 발견해내는 과정을 그렸다.

정신지체라는 어둠에서 빛을 본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믿음이다. 정신지체라는 어둠을 통하여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믿음. 이것이 ‘믿음과 빛’ 공동체 운동의 핵심이며, 내가 매료되었던 부분이다.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는 사회적 비용이 높다’는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은행에서 대출하기가 우리나라처럼 어려운 나라도 없다고 한다. 근저당이 설정될 동산이 있음에도 보증인을 요구하고 그 밖에 제출할 서류도 만만치 않다.

한 개인이 아닌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할 때 드는 사회적 비용을 따져본다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유럽이나 미국은 서명만으로 가능한 일이 우리에게는 꿈같은 현실이라 답답하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런 문제들 대부분이 신뢰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고용주와 고용인, 자연과 인간, 나아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신뢰의 상실은 인간을 어두움의 늪으로 몰아넣는다.

땅속에서 긴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따스한 봄 햇살을 찾아 땅속을 빠져나오듯, 신뢰의 회복은 인간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준다.

사회 전체의 정신적 성숙이 더디지만 그러나, 요즈음은 한 가닥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 지역사회의 빛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쉬운 부분은 정치적, 정략적 목적으로 구호처럼 남발되는 선행과 일회적인 시혜성 행위들이다.

이제는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던 희망의 말들이 선거가 끝남과 동시에 비누거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사막이 희망일 수 있는 이유는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듯이 메마르고 황량한 이 사회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신뢰와 사랑’을 나누는 오아시스처럼 풍성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그래서 서로가 ‘빛’이 되는 사회.

봄이다.

꽁꽁 얼었던 땅을 뚫고 생명을 피워내는 싹들을 본다. ‘희망’은 언제나, 그래서 우리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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