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이임하는 신방웅 충북대 총장

“경북이 고향이지만 충북에서 36년을 살았다. 퇴임하더라도 ‘충북인’으로 남아 미력하나마 ‘충북’에서의 할 일을 찾아보겠다. 또 ‘남은 1년’이지만 여건이 허락한다면 강단에 다시 서보고도 싶다”

신방웅 총장이 오는 5일 오후 개신문화관에서 고별강연과 이임식을 갖고 제 7대 충북대 총장직을 마무리 한다.

신 총장은 이임을 앞둔 간담회에서 특유의 온화한 어법으로 ▶지금 시대의 총장 역할 ▶후임총장에게 하고 싶은 말 ▶재임기간의 아쉬운 점 ▶남은 인생에 대한 설계 등 지난 4년 동안의 소회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 주위에서 대학의 위기를 자주 말하고 있다, 그런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를 헤쳐나가기 위한 4년 동안의 리더십은 무엇이었나.

"조정자와 경영자 역할을 중시했다. 대학은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인 곳이다. 구성원들의 모자라는 부분은 채워주고, 넘치는 부분을 깎아주려 노력했다. 그리고 대학 경영도 결국은 ‘돈’이다. 천박한 표현이지만 ‘돈’을 위해 뛴 4년이었다"

- 신 총장은 공학박사 출신이고, 그런 의미에서 학내 기반시설 확충과 연구환경 개선에 괄목할 성과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기중 기억에 남는 일을 설명해 달라.

"자화자찬 같지만 4년간 골조만 서있던 충대병원 응급센터를 완공했고, 2004년에는 연구비를 전국대학중 가장 많이 받아왔다. 이밖에 공과대 5호관, 의과대 4호관, 기숙사 착공 등 학내 기반시설을 크게 확중했다. 특히 누리사업단, BTI 연구대학, BK21사업 등에 선정된 것은 충북대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충북대의 경쟁력은 상당부분 이곳에서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

- 익히 알다시피 충북대는 이른바 지역 거점대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총장은 재임시 외국대학과 학술교류 협정을 유독 많이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교육철학적인 배경이 있나.

"재임기간 동안 29개국 64개 대학과 학술교류 협정을 맺었다. 미주, 유럽, 동유럽, 아시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나아지리아, 이디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의 대학과 학술교류협정을 맺었다. 지금은 정보화시대로 이른바 時-空이 제로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칸막이가 없어지고 무한경쟁 시대에 들어선 것을 의미한다. 이에 적응하려면 우물을 벗어나 밖으로 나가고, 외부의 장점은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 좀 예민한 질문을 하겠다. 재임기간중 가장 이슈화됐던 사건은 아무래도 충남대와의 통합 문제였다. 물론 구성원간의 극한 대립속에 실패로 돌아갔고 이 점은 후임총장 선거에 가장 큰 평가를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어떤 소회를 갖고 있나.

"못이뤄진 것은 아쉽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구성원 전체합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비온 뒤 땅이 굳는다는 식으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고 본다.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 도내 대학들은 후임총장 선출 시기가 되면 어김없이 학내 분규를 겪고 있다. 국립대인 충북대도 예외가 아니어서 긴 산고 끝에 후임총장을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신 총장의 태도가 우유부단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은데.

"그렇지 않다, 이른바 판을 깨지 않기 위해 막후에서 최선의 노력을 했다. 만약 판이 깨졌으면 학교는 물론 지역사회도 사분오열됐을 것이다.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표현이 왜 나왔는지 이 때 알 수 있었다"

- 후임총장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구성원이 화합돼 있을 때 발전도 있고 진보도 있다. 때문에 조정자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원칙을 버리면 안된다. 또 하나 당부하고 싶은 것은 CEO적인 시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시 ‘돈’이 필요하다. 임기 마지막 해에 욕을 먹어가며 등록금을 크게 올린(11.7%) 것은 후임총장을 배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 지역 지도자급 인사들은 퇴임을 하면 청주는 떠나는 경우가 많다. 신 총장도 경북이 고향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임후는 어떤 인생설계를 갖고 있나.

"36년 충북대에서 처음 교수생활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당연히 고향에 대한 정서 이상이다. 퇴임하더라도 ‘충북인’으로 남아 미력하나마 ‘충북’에서의 할 일을 찾아보겠다. 또 ‘남은 1년’이지만 학내 환경이 허락한다면 강단에 다시 서보고도 싶다"

- 끝으로 재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이는 대충 필요한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지금의 사회는 막연한 전문성이 아닌, 바늘끝 같은 전문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신 총장은 지난해 가을 한 잡지에 ‘꿈은 미래의 자신이다’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긴 바 있다.

'내 인생에 있어 행복했던 시기를 말한다면 아마 10살 전후인 것 같다. 그때부터 차츰 나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전쟁으로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다. 지금과 비교하면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지금처럼 포장된 도로를 보는 것은 큰 도시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끼니 한때 한때를 걱정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해 주신 선진국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내가 건설을 전공하고 교육에 몸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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