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김상수 신부 / 청주노인종합복지회관장


16세기를 지배했던 과학의 패러다임은 천동설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육안으로도 움직이는 하늘을 확인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기에 당연히 천동설은 오랜 시간 인간에게 지배적인 사유의 근간이 되었다.

몇 년 전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공식적인 사과도 있었지만, '지구가 돈다'는 과학적 확신이 죄가 되었던 400여년 전의 갈릴래오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물론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상당 기간이 필요했고, 그리고 나서야 개개 사람들의 생각까지 바뀔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 사회가 요즘처럼 가치관의 대립이 컸던 적도 드문 듯싶다. 인류는 20세기 동안 서로 다른 사상과 이념으로 전쟁을 하거나 대립되어 있었다.

그 영향으로 한반도 이 땅도 사상과 이념에 관한한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곳이다. 다른 체제와 사상에 대해서는 금기시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지금의 양극화는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을 야기 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절대불변의 패러다임은 없었던 듯하다. 지배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루아침에 붕괴 시키는 진보적 가치들과 위험천만으로 비춰지는 발상들이 어느 새 새로운 자리를 차지하고, 뒤이어 새로운 진보들이 줄을 선다.

우리 사회의 의사 결정 구조는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직적이다. 세대나 직위에 상관없이 다양한 가치들이 공유될수록 그 사회는 역동성이 있으며 희망적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몇 년 전 네덜란드인 신부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강의를 하셨다. 사람들이 거의 부동자세로 앉아서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바람에 강의 하는 것이 매우 힘드셨다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경직되고 닫힌 사회는 사람의 자연 발생적인 감정까지도 마비시킨다. 감정을 발산하면 헤프거나 가벼운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기도 한다. 엄격을 강요하는 사회는 사람과 사물의 관계에서 생기는 살아있는 느낌도 죽여 버린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다분히 폭력적이며, 사회문제화 된 청소년들의 폭력성은 어른들이 가진 엄격주의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런 사회 분위기로 인해 우리는 타인에 대해, 특히 나와 생각과 문화가 다른 사람에 대해 배타적이며, 쉽게 적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다양한 사상과 문화가 공존하며 어우러지는 사회라면 폭력성은 생길 수도 없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하는 습관과 문화가 생길 테니 말이다. 인류 역사 안에서 절대 패러다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개인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나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형태도 달라진다. ‘그릇이 큰 사람’이란 사유의 폭이 제한되어 있지 않아 다양한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람이 보는 세계의 크기는 그 사람의 마음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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