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협회 결성 항일운동 초석 마련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신민회를 주도해 국권회복과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한 춘곡 임치정 선생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임치정 선생은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1903년 노동이민을 지원해 하와이 오아후섬의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자로 생활했으며 1904년 근대학문을 수학할 목적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이후 선생은 소학교에 입학해 수학하는 한편, 안창호가 설립한 친목회에 가입하여 한인공동체 형성에 노력했다.

특히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주권침탈을 노골화하고, 해외 한인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자 1905년 4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항일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선생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상실하자 공립협회를 재미동포의 자치기관이자 국권회복운동의 중심기관으로 키워갔다. 대한제국 영사관을 대신할 공립관을 설치하고 기관지로 '공립신보'를 창간했다.

이후 1907년 국내·외 한인단체의 통합과 국권회복운동 역량의 결집을 모색하면서 안창호·이강 등과 함께'대한신민회'를 발기했으며 이후 안창호가 귀국하여 신민회를 결성하자 이강과 함께 환국하여 이를 도왔다.

1907년 겨울 국내로 들어온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을 돕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완용 등의 처단운동을 후원하면서 강력한 주권수호의지를 표출했다.

이후 선생은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해외 독립군 기지 개척과 무관학교 설립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중 양기탁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피체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진남포 3·1운동을 주도했으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동참했다.

이후에도 1920년대 민립대학설립운동, 언론활동 등을 통해 민족운동의 열기를 이어가던 중, 1932년 1월 9일 민족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뇌출혈로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송문용 / 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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