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 박재용 강사 논문서 밝혀

5세기 무덤양식 '前方後圓墳'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고분은 왜 한국과 일본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일까.

한국교원대 박재용(역사교육과) 강사가 호서사학 최근호에 '한국 전방후원형 고분의 출현과 그 배경 연구의 논쟁과 과제' 논문을 20여쪽 분량으로 싣고 있어, 역사 고고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제 일반인에게도 어느정도 친숙한 문화재 용어가 된 전방후원형 고분은 말 그대로 앞은 각지고 뒤는 둥근 모습을 한 고분을 말한다. <사진 참조>지난 80년대까지는 그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후 영산강 유역에 10기 정도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면서 한·일 역사 고고학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임나 일본부설과 마찬가지로 한·일 양국 학자들이 세칭 애국주의(?)에 기초, 자국 중심의 역사이론과 학문적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 고분인 닌토쿠 천황릉으로, 길이가 약 480미터, 면적 140만 평방미터에 이르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닌토쿠 천황이 백제복식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 박 강사는 이번 논문을 통해 '在地首長說'(재지수장설), '倭人移住說(왜인이주설), '倭係百濟官僚說'(왜계백제관료설) 등 3개의 논쟁이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밝혔다.

'재지수장설'은 5~6세기 영산강 유역의 집단이 일본과 교류했거나 또는 일본열도로 이주했다가 귀환, 이후 일본에서 본 전방후원형 고분을 모델삼아 영산강 일대에 묘지를 축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경철 박사는 "영산강 유역 토기와 일본 '須惠器'(수혜기·하부가 빠진 모습) 토기가 비슷한 점은 당시 두 지역의 교류를 증거하는 것"이라며 "영산강 집단은 당시 교역과정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을 새로운 묘제로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설은 그 과정을 증명할 수 있는 사료적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점이 커다란 취약점을 지적되고 있다.

'왜인이주설'은 5세기 후반에 이르러 큐슈의 제 세력이 영산강 유역으로 대량 이주 또는 교역, 이 과정에서 전방후원형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설은 문헌학적 또는 고고학적으로 왜인집단이 영산강 유역에 대규모로 이주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 설은 자칫 임나 일본부설과 결부될 수 있어, 국내 학자들이 거부감을 갖고 있다.

현재는 세번째 설인 '왜계백제관료설'이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설은 ▶5세기쯤 백제의 요청에 의해 한반도 남부에 파견된 왜군이 있었고 ▶이들중 일부는 귀국하지 않고 잔류, 관료가 됐으며 ▶이들이 죽자 출신지 관례에 따라 전방후원형 고분이 축조됐다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박천수 박사는 그 근거로 전방후원형 고분이 웅진기 후반인 짧은 기간에만 존속했고, 석실 유형과 출토품이 일본 큐슈 유력호족과 비슷한 점 등을 들었다.

박 강사는 "영산강 전방후원형 고분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며 "다만 피장자가 누군인지는 아직 결론난 것이 없다"고 밝혔다.



▶ 전방후원형 고분은

앞부분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4각형 공간이 있고 뒷부분에 무덤 시설이 있는 둥그런 형태의 고분을 말한다.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3세기에 출현해 7세기 전반에 소멸했다. 일본 전역에서 7000기 이상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0개 정도 발견됐고, 북한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라 일본부설 이후 한·일 고대사의 최대 이슈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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