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형대구 등 전형적인 마한시대 양식

충북대박물관 '충주 금릉동유적 조사보고서' 발표

3세기 무렵 충주 지역에 마한(馬韓) 소국 중의 하나가 존재했다는 새로운 고고학적인 증거가 발견됐다. 뿐만 아니라 낙랑과도 관련성을 지닌 무덤 유구도 대량으로 발굴됐다.

충북대 박물관(당시관장 신영우교수)은 최근 510여쪽의 '충주 금릉동유적 조사보고서'를 내놨다.

충대 박물관은 지난 2004년 4월 금릉동 유적지(현 충주세무서 자리)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나 발굴양이 워낙 방대, 관련 내용을 일체 공개하지 않고 유물분석, 보존처리 작업 등을 해왔다.

3년만에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금릉동 유적지 210기의 무덤 유구에서 토기류, 목관묘, 환두대도(둥근머리 큰칼), 마형대구(말모양 혁대버클), 철모, 철촉, 재갈 등 구석기~조선시대 유물이 층위·시대별로 다양하게 출토됐다.

특히 이중 3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는 기마인물형 토기, 마형대구, 목관묘는 당시 충주지역에 마한 소국 중의 하나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여서, 국내 고고학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고고학계는 3세기 무렵 충주지역에 대해 ▶예족(동예)과 교류하며 동화됐던 모습이 보이고 ▶그 이후에는 적석총 문화권(고구려계)에 편입됐던 것으로 봐왔다.

우종윤(충대 박물관 학예실장) 당시 책임 조사원은 "원저단경호(밑이 둥글고 목이 짧은 토기) 등은 마한시대 청주지역을 대표하는 토기"라며 "이번에 금릉동에서도 이와 똑같은 유형의 토기가 대량 발굴됐다"고 말했다.

또 마형대구에 대해 언급, "이것 역시 신봉동 고분군 등 마한시대 청주를 대표하는 철기류"라며 "따라서 2개의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충주에도 마한 소국의 하나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밖에 목관묘는 낙랑과의 교류내지 낙랑유민 유입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또 다른 방향을 관심을 끌고 있다.

성정용 충북대 교수는 "당시 낙랑은 합장묘를 많이 썼는데 금릉동에서도 합장묘가 많이 발굴됐다"며 "다만 충주에 유입된 후 목곽+목관이 합쳐진 '목곽계 목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에 흔치않은 환두대도도 함께 출토, 당시 충주 일대에 강력한 권력의 무사집단 지배계급이 존재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 마한(馬韓)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분포한 54개의 소국을 가리킨다. 진수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마한 54소국은 큰 나라는 1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모두 합하면 10여 만 호(戶)가 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동쪽 끝 경계가 어디였는지는 규명되지 않았었다.

# 해설
지금까지 국내 고고학계는 초기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혹은 월지국)이 청주-청원-천안 사이에 존재했다고 봐왔다. 충주는 마한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발굴로 마한 세력권의 동쪽 가장자리에 충주가 위치했음이 밝혀졌다.

성정용 교수는 "중국 삼국지 동이전은 마한에 54개 소국이 존재했다고 적고 있다"며 "이번 발굴을 기초했을 때 3세기 무렵 충주에는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노국(莫盧國) 중 하나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는 '韓滅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표현이 나오고 있다. 의역하면 '한예가 강해져서, 낙랑은 잘 통제를 못했다. 때문에 낙랑유민 상당수가 한국으로 유입됐다' 정도가 된다. 이때의 '韓國'은 마한을 가리킨다.

성 교수는 "금릉동 목곽계 목관은 삼국지 동이전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며 "낙랑유민이 들어올 때 묘제 기술자로 함께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금릉동에서 철기류 유물이 유난히 많이 나온 것과 관련해서는 충주 칠금동 제철시설이 생산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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