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남한강 수계 3개 석탑

남한강 수계에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단양 가곡면 향산리 삼층석탑(보물 405호), 제천 장락동 7층 모전석탑(보물 459호), 충주 탑평리 7층석탑(일명 중앙탑·국보 6호) 등 3개의 석탑이 존재하고 있다.

불교 상식상 탑은 사철경내 중심에 위치하고, 그 사찰은 배산임수의 풍수적 논리에 따라 산중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탑의 본래 기능은 부처 사리를 모셨던 곳이기 때문에 사찰내 다른 건축물보다도 중요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기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 인지 남한강 바로 옆에 다양한 양식의 석탑을 집중적으로 세웠다.

경기도 여주 신륵사 7층전탑과 원주 법천사지 석탑은 비록 충북경계 밖에 위치하지만 '남한강 수계 석탑'으로 분류되고 있다.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단양읍에서 동쪽으로 16㎞떨어진 산골짜기의 밭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1935년 탑 속의 사리를 도둑맞으면서 허물어졌던 탑을 마을 주민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구조로, 꼭대기 머리장식으로 노반(머리장식받침)과 복발(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있다.

돌을 다룬 짜임새가 규율성이 나타나고 조각수법도 우아, 통일신라 석탑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제천 장락동 7층모전석탑

회흑색의 점판암으로 조성된 모전석탑으로 높이가 9.1m에 이르고 있다. 건립연대는 탑의 형식이나 돌 가공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되고 있다.

7층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각 층의 비율이 적당히 줄고 있어, 장중한 외양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때 입은 심한 피해로 무너지기 직전에 있었으나 지난 1967년 해체 복원했다.

이때 7층 지붕돌 위에서 꽃모양이 새겨진 청동편이 발견돼 상륜부는 청동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충주 탑평리 7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으로도 불리운다. 흙으로 높게 쌓은 단 위에 2층의 기단과 7층의 탑신을 올렸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됐다.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금도 주요 운송품의 하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서해안을 통해 대중국 무역교류를 했다. 그 루트는 경주-영남대로-소백산맥-남한강수계-여주-이천-평택-아산만이었다. 영남대로는 한양-여주-충주-소백산맥-안동-상주-경주를 잇는 옛 물길과 땅길을 말한다.

이 루트를 통해 농산물, 각종 공예품 등 무역물자를 반출하고, 돌아올 때는 서해안에서 생산된 소금을 싣고 왔다. 물론 남한강은 수운(水運). 그 이외 지역은 육운(陸運)이었다. 이 때문에 영남대로는 '염지통'(鹽地通)으로도 불리었다. 이를 통해 경북 북부지역에 소금을 공급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 대목서 궁금한 점이 있다.

왜 한강하구에 위치한 강화도까지 내려가지 않고, 여주에서 '좌회전'을 해 이천-평택-아산만 루트를 이용했느냐는 점이다.

강화도를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지금도 일대는 급류가 흐르고 있다. 물살이 워낙 사나워 윙! 윙!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다. 이는 배를 정박시키는데 매우 어려운 지형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같은 입지 때문에 강화도는 전란이 발생하면 왕실의 피난지 그리고 평시에는 유배지로 자주 이용됐다. 고려는 몽고침입 때 강화도로 임시 천도를 했고, 조선 철종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바로 통일신라가 한강하구가 아닌 아산만을 대중국 루트로 사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물론 대중국 루트는 경기지역 농산물과 서해 해산물을 수송하는 국내 루트로도 겸용됐을 것이다.

■석탑을 향해 무사안녕도 기원

지역 사가들에 따르면 향산리, 장락동, 탑평리 3개 석탑은 통일신라이 대중국 루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먼저 서두에 언급한대로 남한강 수계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 외에도 눈에 잘 띄는 곳에 위치하고 있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는 흙을 돋워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하는 등 조망권이 매우 우수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일부 탑의 경우 최고 140m까지 다짐흙을 북돋웠다.

이밖에 거대한 탑이 존재함에도 불구, 절이 있지 않았거나 존재했어도 그 규모가 매우 작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탑평리 7층석탑과 향산리 석탑에서는 아직 절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장락동 모전석탑은 충청대학 장준식 교수 발굴팀에 의해 사찰이 존재했음이 확인됐으나 그 사찰건물은 단 1개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여느 대찰에서 볼 수 있는 회랑를 두른 'ㅁ자형' 복합양식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뭘까. 이들 3개 석탑은 남한강 수계의 '등대+이정표' 역할이 우선시 됐던 석조물이었다. 큰 강가는 항상 범람의 위험에 노출되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에 석탑을 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길 안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 석탑은 단양, 제천, 충주, 여주 지역에 하나씩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 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이들 석탑에 거리개념, 즉 이정표 기능이 들어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신라 때는 사람이 하룻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마다 사찰을 세웠다'는 설과도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이밖에 당시 사람들이 남한강을 오르내리면서 이들 석탑을 향해 무사안녕을 기원했을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는 백제 사람들이 중국을 갈 때 서산 마애불에 기도를 올렸던 것과 유사한 구조다.

■장락사 근처로 당시에는 물흘러

배는 뗏목배가 아닌 평저선이 이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뗏목배는 말 그대로 뗏목을 나르던 배로, 물흐름 따라 하류 방향으로만 운항할 수 있다. 대신 밑이 평평한 평저선은 여울을 쉽게 넘을 수 있고, 물품을 많이 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논리에 벗어나 있는 것이 있다. 제천 장락동 7층모전석탑은 지금은 남한강 수계와 동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장준식 교수 등이 지난 2004년 발굴조사한 결과, 석탑옆 바로 밑에는 뻘층이 존재하는 것이 발견됐다.

이는 일대가 통일신라 때는 큰 하천가로 배가 드나들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제천 고암천과 남한강의 합류 지점이 존재하고 있다. 장 교수는 지금도 "장락동 7층모전석탑은 사상누각 위에 지어진 석탑"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한강을 올라온 배는 소백산맥부터는 육운을 이용해야 한다. 전문가들 그 루트를 한 곳이 아닌, 죽령과 계립령(하늘재) 등 2곳으로 보고 있다.

■보국사와 대원정사도 동시대에 건립

계립령은 우리나라 제 1호 도로로 신라 아달라왕 3년(156년)에, 죽령은 그보다 2년 늦은 죽죽에 의해 개척된 것으로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이들 2개 도로는 조선초기 조령(새재)이 개설되기까지 소백산맥을 넘나드는 주요 교통로였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 대동맥으로, 고속도로에 해당된다.

통일신라는 이 고속도로 주변에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죽령에는 보국사(단양 대강면), 계립령에는 대원정사(현 충주 미륵리사지)를 세웠다. 발굴조사 결과, 이들 대찰은 국가 사찰 성격 외에 전쟁 등 유사시에는 병참기지 역할도 수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상을 종합하면 통일신라는 수운은 남한강을, 이것과 연계된 육운은 죽령과 계립령을 이용한 것이 된다. 통일신라의 땅길, 물길 모두는 충북을 통했다. 이를 지도로 그리면 '-◇-'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의 한 개는 남한강 수계이고 또 다른 것은 영남대로가 된다. 그리고 마름모꼴 꼭지점에는 소백산맥 죽령과 계립령이 위치하고 있다.

☞전탑과 모전석탑은

검은 회색 또는 회색 벽돌로 쌓은 탑으로, 중국에서 비롯됐다. 현존하는 양식으로는 여주 신륵사 5층전탑과 안동 신세동 7층전탑이 있다. 특히 안동 그 수가 많아 '전탑(塼塔)의 고향'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에 비해 석재가 무척 풍부하다. 따라서 전탑은 얼마안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바뀌게 된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만든 석탑을 말한다. 경주 분황사와 제천 장락동 석탑이 대표적인 예가 되고 있다.

☞소금의 중요성

국가내지 집단간 물자교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다. 이 교역품중 가장 중요한 것이 소금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생존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사가들은 중국 진나라가 강성했던 이유로 영토 안에 '鹽池'로 불리우는 소금 생산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또 삼국사기를 보면 한반도에 상륙한 당나라군이 한때 백제 부흥군에 의해 포위되면서 소금 결핍증을 겪자 신라군이 소금을 급히 보급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구석기인들이 어떻게 소금을 보충했는지는 선사 고고학의 최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참고로 소금의 '소'는 한자 '흴 素' 자로, '하얀 금'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주 쓰는 단어인 '소면'과 '소복'도 한자 '흴 素' 자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소면은 '하얀 면발의 국수', 소복은 '하얀 옷'이 된다.

도움말: 장준식 충청대 박물관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키워드

#연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