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무덤 양식은 원삼국 시대는 움무덤(토광묘), 4~6세기초의 전기는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 6세기 중엽후 통일시대까지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적석목곽묘에서는 금관이 많이 나왔다. 금관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이 양식을 취하고 있다. 횡혈식 석실묘로는 양산 부부총, 경주 쌍상총이 유명하다.
이상에서 보듯 신라계 무덤은 주 세력권이었던 경주 일대와
경상도 지방에 집중적으로 산포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서 족히 1천리 이상 떨어진 충주시 가금면 일대에 신라계 대형 횡혈식 석실묘가 최소
수백여개가 존재하고 있다.
■우륵이 충주에 온 이유도 이주정책
결과
신라가 왜 부도를 건설 했는지는 추론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토 확장에 따른 지배 세력수 조절과 금성의 도시기능 분산
▶남한강 물자교역 루트의 안전한 확보 ▶이를 통해 북진 교두보를 구축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친 금성의 지리적 불리함 극복 등의 의미가
담겨져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당시 신라군은 추풍령, 계립령(하늘재)이 아닌 단양 죽령을 통해 충주로 진격, 고구려군이
지키고 있던 국원성을 공취했다. 앞 내용중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이 바로 이 대목이다.
신라는 충주에 국원성 자리에 중원경을
설치한 후 성곽 건립과 주민이주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남항강 수계에 위치한 단양 적성, 제천 망월산성, 충주 남산성·장미산성, 여주
파사성, 하남 이성산성 모두는 이때 새롭게 축성됐거나 고구려가 사용하던 것을 리모델링했다.
또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인 우륵, 김생, 강수
등은 신라의 이주정책에 의해 경주에서 충주로 거주지를 옮긴 인물들이다.
이후 신라는 부도 충주를 지렛대삼아 한강유역을 완전 점령하고,
100여년 후에는 대동간-원산만을 잇는 삼국통일을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우륵이 언급된 대목은 또 다른 방향의 궁금증을 낳는다. 우륵이
수도 금성에 거주하지 않고 변방 충주에 정착한 점은 다소 의외다. 이는 우륵의 출신성분과 관련이 있다. 익히 알다시피 우륵은 신라 왕족이 아닌
가야출신 악사이다. 지금으로 치면 '비주류 유명인사'가 된다.
이와 관련, 충북대 양기석 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서 우륵을 '신라의
총알받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는 우륵이 국가 이주정책에 의해 변방 불안한 도시인 충주로 내몰렸음을 의미하고
있다.
■김유신 아버지도 보이지 않는 차별당해
엄밀히 따지면 김유신 가문도 같은 반열에 속하고 있다.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 마지막 왕은 김구해이고 김무력은 그의 막내 아들이다. 그리고 진천 태수였던 김서현은 김무력의 친아들, 김유신은 그의 친손자가
된다.
이쯤되면 김유신이 경주가 아닌, 진천에서 태어난 이유도 알 수 있게 된다. 김유신 아버지 김서현도 출신지역 차별 때문에 수도가
아닌 변방을 전전해야 했다. 지금으로 치면 '수도사령관'이 아닌 'GOP사령관'인 셈이다.
누암리 고분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지역 역사학자들에게 또 다른 숙제를 던져놓고 있다. 중원경의 치소, 즉 읍성이 어디였냐는 지금도 주요 논쟁거리이자 미제로 남아
있다.
국내 학자들 사이에 ▶중앙탑 일대설 ▶지금의 충주 도심인 교현동 설 등이 있으나 아직 정설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없다.
이처럼 신라 중원경 하나에서는 역사의 사연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당겨져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충주 누암리,
하구암리 고분군은 충주가 신라 금성의 부도 기능을 하면서 생겨난 당시 공동묘지라는 점이다. 어쩌면 충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였다.
# 김유신과 진천
김유신이 진천에서 태어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진천에 태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유신 부모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국사기는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중매를 거치지 않고 눈으로 꿰여서 야햡했다'라고 적고 있다.
김유신 아버지는 김서현이고, 어머니는 만명부인이다. 두 사람은
사랑했으나 진골계 만명부인측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자 만명부인은 경주를 탈출, 사랑하는 사람의 부임지인 진천으로 왔다. 둘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이다. # 화랑과 순교주의
흔히 사가들은 신라가 수행한 전행을 가리켜
'귀족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평민이나 노예는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고, 귀족 자제들이 주로 전쟁을 수행한 것을 의미한다. 그
중심에 화랑이 있었다.
관창의 예에서 보듯 화랑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지금의 이슬람 순교주의와
비슷한 일면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당시 신라의 교묘한 전쟁 수행정책이 내재돼 있다.
당시 신라는 화랑이 순교를 하면 그
유족들에게 식읍(토지, 노예)을 더 주고, 관직을 상승시켜 주었다. 어찌보면 화랑은 당시 전쟁 수행정책의 희생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