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정책으로 영토 확장되자 충주 副都삼아

(8) 충주 누암리 고분군

신라무덤 양식은 원삼국 시대는 움무덤(토광묘), 4~6세기초의 전기는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 6세기 중엽후 통일시대까지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적석목곽묘에서는 금관이 많이 나왔다. 금관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이 양식을 취하고 있다. 횡혈식 석실묘로는 양산 부부총, 경주 쌍상총이 유명하다.

이상에서 보듯 신라계 무덤은 주 세력권이었던 경주 일대와 경상도 지방에 집중적으로 산포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서 족히 1천리 이상 떨어진 충주시 가금면 일대에 신라계 대형 횡혈식 석실묘가 최소 수백여개가 존재하고 있다.

충주 가금면 일대의 누암리 고분군 모습으로, 규모가 워낙 커 위(작은 사진)·아래로 촬영했다. 신라무덤 양식은 원삼국 시대는 움무덤(토광묘), 4~6세기초의 전기는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 6세기 중엽후 통일시대까지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적석목곽묘에서는 금관이 많이 나왔다. 금관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이 이 양식을 취하고 있다. 횡혈식 석실묘로는 양산 부부총, 경주 쌍상총이 유명하다. 이상에서 보듯 신라계 무덤은 주 세력권이었던 경주 일대와 경상도 지방에 집중적으로 산포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서 족히 1천리 이상 떨어진 충주시 가금면 일대에 신라계 대형 횡혈식 석실묘가 최소 수백여개가 존재하고 있다. 지난 2005년 국가사적 제 463호로 지정된 누암리 고분군은 아직 발굴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족히 1천여기가 넘고 있다. 이곳서 직선거리로 3~4㎞ 정도 떨어진 곳에도 같은 시기 신라계 무덤인 하구암리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다. 6세기 중엽 충주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누암리 고분군충북대 박물관은 지난 1989, 90, 91년 등 3차례에 걸쳐 일대에 대한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일대에서는 대형 봉토석실묘, 짧은굽다리접시, 바리, 합, 항아리, 철기류 등 유구와 유물이 다양하게 발굴됐다.특히 이들 유구와 유물은 전형적인 신라계 양식이고, 시대는 6세기 중엽으로 편년됐다. 석실묘는 경사진 면을 'L자'로 깎아낸 후, 지상에 봉분을 설치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러나 석실 내부에서는 비닐봉지와 병마개가 발견되는 등 도굴 흔적이 역력, 아쉬움을 주기도 했다.■하구암리 고분군가금면 하구암리 고분군의 존재는 중부내륙고속도로 건설 과정의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졌다. 충북대 박물관(당시 관장 양기석 교수)은 지난 2000년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그 결과, 일대 고분군에서는 누암리와 거의 같은 모습의 석실묘가 대량 확인됐다. 다만 첫 조영 시기는 누암리보다 다소 늦은 6세기 후반으로 편년됐다. 따라서 누암리 무덤의 추가장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하구암리 고분군은 신라의 충주 진출에 대한 엄청난 정보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 아직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고 있다.■5소경, 소백산맥 넘어 방사선 모양 설치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던 신라는 6세기 중엽 진흥왕대에 이르러 대唐 외교관계가 성공을 거두고 또 화랑들이 순교자 정신으로 전쟁을 수행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됐다.진흥왕은 이를 바탕으로 백제를 한반도 서남쪽 코너로 더욱 밀어부치고, 또 금강까지 내려온 고구려를 북쪽으로 밀어올리면서 한강유역까지 진출했다.영토가 넓어지자 신라는 점령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북원경(원주), 중원경(충주),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금관경(김해) 등 이른바 '5소경'을 설치하게 된다.북원경은 강원도 영서지역, 중원경은 남한강권, 서원경은 금강권, 남원경은 영산강권, 금관경은 가야 및 남해안권을 직·간접적으로 관할했다. <지도참조>지도를 보면 신라가 5소경을 어떤 이유에서 설치했는지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금성(지금의 경주)을 중심으로 금관경을 제외한 4개 소경의 설치 방향이 소백산맥을 넘어 방사선 모양으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충주 누암리 고분군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됐다. 그러나 이 대목은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 중원경을 제외한 나머지 4곳의 소경에는 신라계 무덤이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극소수에 그치고 있다. 서원경이었던 청주에는 당시 무덤이 손에 꼽을 정도로만 존재하고 있다.이에 비해 누암리와 하구암리 일대에는 신라계 무덤이 최소 1천기 이상 존재하고 있다. 당시 인구수를 감안하면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다. 규모도 비교적 큰 편으로, 가장 큰 것은 밑변이 30m가 넘는 것도 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중심복합도시 해당이에대한 답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편에서 찾아지고 있다.'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진흥왕 12년·551), '秋七月取百濟東北鄙 置新州以阿滄武力軍主'(진흥왕 14년·553), '以國原爲小京'(진흥왕 18년·557), '春二月徙貴戚弟 及六部豪民 以實國原'(진흥왕 19년·558), '秋八月命阿滄春賦 出守國原'(진흥왕 26년·565)문장을 순서대로 의역하면 '왕이 거칠부 등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했고 그 결과 10개 군을 얻었다', '가을 7월에는 백제 동북 마을을 공격해, 그곳에 새로운 州를 설치하고 아창 무력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진흥왕 18년 봄 2월에는 국원에 소경을 설치했다', '춘2월에는 귀척제와 6부의 호민을 이주시켰고, 이로써 국원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게 됐다', '추8월에는 아창 춘부에 명해 국원을 지키도록 했다' 등의 내용이 되고 있다. 이중 '국원'은 지금의 충주. '귀척제'는 진골의 자제, '호민'은 지방 지배자를 의미하고 있다. 이는 당시 신라가 5소경중 충주를 가장 중요시 여겼음을 의미하고 있다. 경주의 귀족 자제를 5소경중 유독 충주로 이주시켰다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6개의 짧은 문장 안에 '국원'에 대한 언급이 3번이나 나오고 있다. 바로 진흥왕 때의 신라는 충주에 금성의 다음가는 도시, 즉 부도(副都) 기능을 부여했다. 지금의 행정중심복합도시 기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신라 5소경의 지도로, 통일신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 유지됐다. 금관경을 제외하고 소백산맥 넘어에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우륵이 충주에 온 이유도 이주정책 결과

신라가 왜 부도를 건설 했는지는 추론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영토 확장에 따른 지배 세력수 조절과 금성의 도시기능 분산 ▶남한강 물자교역 루트의 안전한 확보 ▶이를 통해 북진 교두보를 구축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친 금성의 지리적 불리함 극복 등의 의미가 담겨져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당시 신라군은 추풍령, 계립령(하늘재)이 아닌 단양 죽령을 통해 충주로 진격, 고구려군이 지키고 있던 국원성을 공취했다. 앞 내용중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이 바로 이 대목이다.

신라는 충주에 국원성 자리에 중원경을 설치한 후 성곽 건립과 주민이주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남항강 수계에 위치한 단양 적성, 제천 망월산성, 충주 남산성·장미산성, 여주 파사성, 하남 이성산성 모두는 이때 새롭게 축성됐거나 고구려가 사용하던 것을 리모델링했다.

또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인 우륵, 김생, 강수 등은 신라의 이주정책에 의해 경주에서 충주로 거주지를 옮긴 인물들이다.

이후 신라는 부도 충주를 지렛대삼아 한강유역을 완전 점령하고, 100여년 후에는 대동간-원산만을 잇는 삼국통일을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우륵이 언급된 대목은 또 다른 방향의 궁금증을 낳는다. 우륵이 수도 금성에 거주하지 않고 변방 충주에 정착한 점은 다소 의외다. 이는 우륵의 출신성분과 관련이 있다. 익히 알다시피 우륵은 신라 왕족이 아닌 가야출신 악사이다. 지금으로 치면 '비주류 유명인사'가 된다.

이와 관련, 충북대 양기석 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에서 우륵을 '신라의 총알받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는 우륵이 국가 이주정책에 의해 변방 불안한 도시인 충주로 내몰렸음을 의미하고 있다.

■김유신 아버지도 보이지 않는 차별당해

엄밀히 따지면 김유신 가문도 같은 반열에 속하고 있다. 신라에 항복한 금관가야 마지막 왕은 김구해이고 김무력은 그의 막내 아들이다. 그리고 진천 태수였던 김서현은 김무력의 친아들, 김유신은 그의 친손자가 된다.

이쯤되면 김유신이 경주가 아닌, 진천에서 태어난 이유도 알 수 있게 된다. 김유신 아버지 김서현도 출신지역 차별 때문에 수도가 아닌 변방을 전전해야 했다. 지금으로 치면 '수도사령관'이 아닌 'GOP사령관'인 셈이다.

누암리 고분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지역 역사학자들에게 또 다른 숙제를 던져놓고 있다. 중원경의 치소, 즉 읍성이 어디였냐는 지금도 주요 논쟁거리이자 미제로 남아 있다.

국내 학자들 사이에 ▶중앙탑 일대설 ▶지금의 충주 도심인 교현동 설 등이 있으나 아직 정설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없다.

이처럼 신라 중원경 하나에서는 역사의 사연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당겨져 나오고 있다. 분명한 것은 충주 누암리, 하구암리 고분군은 충주가 신라 금성의 부도 기능을 하면서 생겨난 당시 공동묘지라는 점이다. 어쩌면 충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계획도시였다.

# 김유신과 진천

김유신이 진천에서 태어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진천에 태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유신 부모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국사기는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중매를 거치지 않고 눈으로 꿰여서 야햡했다'라고 적고 있다.

김유신 아버지는 김서현이고, 어머니는 만명부인이다. 두 사람은 사랑했으나 진골계 만명부인측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자 만명부인은 경주를 탈출, 사랑하는 사람의 부임지인 진천으로 왔다. 둘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이다.
# 화랑과 순교주의

흔히 사가들은 신라가 수행한 전행을 가리켜 '귀족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평민이나 노예는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고, 귀족 자제들이 주로 전쟁을 수행한 것을 의미한다. 그 중심에 화랑이 있었다.

관창의 예에서 보듯 화랑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지금의 이슬람 순교주의와 비슷한 일면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당시 신라의 교묘한 전쟁 수행정책이 내재돼 있다.

당시 신라는 화랑이 순교를 하면 그 유족들에게 식읍(토지, 노예)을 더 주고, 관직을 상승시켜 주었다. 어찌보면 화랑은 당시 전쟁 수행정책의 희생양이었다.

도움말: 차용걸 충북대교수, 양기석 충북대 교수, 장준식 충청대 박물관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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