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태어나고 담양서 생활한 정철…왜 진천에 묘가 있을까?
따라서 당시 정서로 보면 송강의 묘가 진천 문백으로 이장될 이유가 거의 없고, 지금까지 이 부분을 관심있게 지켜본 학자도 많지 않았다.
임 총장은 이날 세미나에서 이를 '동서인 당쟁론'으로 명쾌하게 설명했다. 임 총장에 따르면 당시 송강은 서인의 총수로, 동인계와 정치적인 갈등을 빚었다. 당시 우암은 송강의 고제(뛰어난 제자)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암은 동인장악 지역(영남)을 제외한 충청, 호남 지역의 선비사회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다. 이 과정을 거쳐 태어난 것이 이른바 '호서사림'이다.
그러나 당시 진천 선비사회는 동·서인중 어느 누구도 진출하지 못한 무주공산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우암이 경기도 고양에 있었던 송강의 묘를 이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던 진천지역 일부 후손과 의논해 송강 묘를 이전하고 사우를 건립했다.
스승의 묘를 안전하게 이장한 우암은 감격에 젖어 '松强遷葬 有感而作'이라는 오언율시를 남기게 된다고 임 총장은 이날 세미나에서 밝혔다.
'是非自有當 / 宅兆今始臧 / 天上三先照 / 人間萬事荒 / 凄凉辰巳歲 / 警怪虎惺章 / 何以稱明德 / 寒流薦一觴'
임 총장은 이를 '시비는 끝내 정해지는 법 / 이제야 비로소 안장하였네 / 하늘에는 일월성신 비추지만 / 인간에는 만사가 거칠구나 / 처량했던 진사의 해였고 / 놀라운 호성의 글이로다 / 무엇으로 밝은 덕에 맞출쏜가 / 맑은 술 한잔 올리네'로 의역했다.
임 총장은 "새 세거지를 마련한 송강 후손가에서는 정치, 정호(영의정을 지냄), 정식, 정경연 등이 배출되는 등 400여년 명문가 전통을 잇게 된다"며 "이 영향으로 문중 묘지도 진천을 넘어 멀리 충주 노은면까지 진출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날 세미나에는 임 총장 외에 김갑기 동국대 교수가 송강의 생애와 문학 발표를 하고 김홍은(전 충북대 교수), 김영대(충주문화원사무국장) 등이 발표자로 참여했다.
한편 충북개발연구원 김양식 박사는 송강을 선양하고 송강정사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학술연구 심화 ▶진천=문학고장 이미지화 ▶주변 역사문화 공간으로 개발 ▶어은팔경 디자인화 ▶송강문학마을 조성 등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 /P>
조혁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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